- Title
- 23-남녀대협 의장을 결의하며
- Summary
- 남녀대협 의장을 결의하며 생각해보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던 같습니다.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배웠던 수많은 생각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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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대협 의장을 결의하며
생각해보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던 같습니다.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배웠던 수많은 생각 그리고
대학교에 오면서 무참히 깨어졌던 나의 상식 아닌 BAS. 그 후 여학생운동을 배우기까지.… 그런데 광
주전남지역의 여학운동을 책임지고 이끌어가겠다고 결의하고 보니 운동을 시작할때의 결의, 96년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를 같던일,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눈물과 RES 짜면서도 그 ATS 버티고 시민들
을 만났던 기억들, 연대항쟁 때 잡혔던 기억...주옥같은 추억들이 떠오르게 되는군요.
이제 제 운동의 결실을 맺을 98년. 어느 해보다도 제 생애 최고의 해로 YS 98년. 5만 여학우와 10만
청준과 함께 반외세 자주화 투쟁의 해로 만들어 나갈 98년. 그 첫 포문을 남녀대협 의장을 결의하면서
시작하렵니다.
저는 1976년 10월 3일 물 하고 산 좋은 지리산 Wea 태어났습니다. 평범한 공무원 생활을 하신 아
버님과 충실히 가정주부생활을 하셨던 어머님 사이에서 3녀 1남 중 gaz 태어났구요. 3 위인 언니
와 4살 아래인 여동생, 6살 아래인 막둥이이고 그 막내가 아들인 귀남이 집이랍니다. 구례에서 6살때까
A 살다가 바로 광주로 와서 구례에서 살때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어릴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고
, 삼촌들과 wl 살았기 때문에 엄하고도 엄한 무척이나 가부장제적인 집안에서 AFuch. 아마 초등
학교 때까지 eels 내성적인 저의 성격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러다가 친구
이 사귀고 또 성격 활발한 친구들과 자주 지내나 보니 저도 자연스레 좀 더 활달해지게 되었고
도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점차 줄어들어 갔습니다. 중학교 ,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저는 선생님
이라먼 꼬박하고 죽을 만큼 모범생이었습니다.(하하 a] 혼자만의 착각은 절대 아니었구요. 진
생이라고 불리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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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도 무언가를 배우고 사회에 반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국
어션생님이 발령받아서 우세는데 대학을 갓 졸엽한 선생님이었답니다. 그 선생님 밑에서 국어를 WAS
데 국어보다는 음악과 토론을 더 많이 배웠습니다. 광야에서, 사노라면, 작은 연못 등의 민중가요-그 때
는 조금 재미없는 가요인줄 알았죠-도 배우고 광주민중항쟁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그랬답니다. 광주민중
항쟁에 대해서 토론을 할 때는 정말 재밌었습니다. 한 조가 조사를 해와서 발표를 했는데 우리모두는 충
이었죠. 빨간색 표지로 된 책자였는데 사람들 총 맞은 부위, 상처하며 죽은 시체 모습 그대로 실어놓
중격의 빨간책! 이 책이 반에서 공개되자 5.18때 나도 이런 이야기 들었다면서 너도 나도 이야기 하
시작했고 온 학교에 이 이야기와 책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끔찍했지만 뭔가 새로운 사실을, 책에는
지 않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무척 SS 유발시켰나봐요. 그리고 전 그 뒤로 국어선생님을 가장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이엄마가 되었지만 그 때는 저의 아니 다수의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
던 국어선생님! 아마 저에게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게 해준 사람중에 Al 번째 사람일거란 Bo]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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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학교를 보내고-광주민중항쟁이란것도 거의 기억속에 묻혀 지내버렸지만-고등학교를 입학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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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 해는 언니는 대학교로 나는 고등학교로 동시에 진학하게된 경사가 겹친 해였죠. 하지만 그
‘is 잠시 우리집안에서 언니가 대학성활을 처음하게 되면서 ny 벌어지는 모든 성활을 eh
와 아빠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언니는 교육동아리에 들게 되었고 그결 말리려는 부모님과 마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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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y a 언니와 저는 어렸을 때부터 속 터놓고 지내는 사이라서 언니는 언니의 모든 생활을 저에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밤 늦게 매캐한 Bast 함께 들어오는 횟수가 Reply
는 더 Rol] 시작하면서 전 언니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7 Ge
님의 걱정을 더욱 가중시키는 언니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고 언니가 하는 일-운동이죠-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93년도에 언니의 제일 친한 선배였던 이경동이라는 선배가 ASW) 철폐,
교육재정확보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언니는 더욱 더 당당히 운동의 길을
가게되었고 저는 그럴수록 언니의 Go]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of
마 제 운동의 길에 영향을 주었던 두 번째 사람일거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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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게되었습니다. 합격자명단을 확인하러 엄마랑 함께 전남대학교에 발을 들
『 엄마랑 했던 3가지 약속이 있었습니다. 첫째, aa 말 것. 둘째, 연애하
둘이 있지말 것. 지금은 비록 다 어겼지만은요. 고등학교때 언니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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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엄마와의 약속 때문에 전 데모라면 이도 안 갔습니다. 그 대신 SS 좋아해서
부터 4월, 5월달까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Ss 마실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어
것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하루하루 먹어도 속만 버리게 되었고 아무런 낙도 없
그 때 저에게 나타났던 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때 단대 여학생회 부회장을 하고 있
이 습니다. 이 선배는 후에 제 운동의 길에 영향을 준 세 번째 사람입니다.
SHS 따라 5.18 도청집회에 처음 나가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과 함께 토론했던 그
과 함께 EAS Sas 시민과 학생인파들. 전 놀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 전 그 선배의
으로 여학생회 소모임에서 PES 하게 되었고 점점 많은 것을 배워 나가게 되었습니다. 1학년때는
을 빠뜨리고서도 투쟁이 있다면 나갈 정도로 열정적으로 모든 투쟁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95년 통일원년으로 서울에서 판문점진격투쟁으로 전개되었던 통일투쟁이 생각이 납니다. 처음 본 백만
개의 라이터 불빛, 수많은 학우들, 눈물나는 최루연기속에서 날 도와주던 이름모를 한 남학우, 12개의
갖에서도 쏟아지는 HS 참지 조해 =e ka 일, BF 냄새 진동 " " 시민들에게 목이 터져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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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특별법 제정투쟁을 했던 것도 생각이 답니다. 5월부터 108 카지 2 6개월에 Set
8, 특검제 실시,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이 구호를 외쳤던 우리 투쟁. 시민들의 박수
리, 아주머니들이 공짜로 주시는 물, 음료수 그리고 특별법이 제정되던 날 그 날의 집회
다. 되지 SS 것만 같이 지루히 계속되던 투쟁이 어느 새 현실이 되어 성과물로 우리 앞
우리는 어리둥절해서 아무말도 RRS, = 그 그 다음날 전 직 대통령으로서 첫 구속이라는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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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또 하나의 기억. 그건 ae 민족 리의 기간에 수요집회이 참여했던 것이었습니다. 전여
이 대표로 일본대사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일본대사관으로 통하는 지하철역부터 막아서
습니다. 그리고 대표로 20명 정도의 학우들만 일본대사관까지 가도록 허락했고 저도
. 하지만 그 후의 기억은 없습니다. 일본대사관앞에 도달하자마자 지하철역을 막아서
전경들을 보고 그 앞에서 너무나 초라하게 시위하고 계시는 할머님들을 보니 눈물이 앞
할 수 없었습니다. 마구마구 울었던 기억만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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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도 여학생회 부회장을 했던 해입니다. 처음으로 간부를 하다보니 처음부터 뼈걱삐걱 저의 할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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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생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대항쟁이었습니다. 뭔가 해보고자 ALE 향했고 거기서 열
통일투쟁을 벌여내고 지울 수 없는 기억 OF 10일간의 SASS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잠도 제대
자지 못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그 뜨거운 동지애 하나로 버티었던 9박 10일. 빨갱이로 매도
고 폭력집단으로 매도되면서 억울하고도 답답하게 보냈어야만 했던 연대항쟁. 전 거기서 우리나라 언
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나와서 불구속이라는 딱지를 달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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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은 AA 있어 더 큰 여학생운동을 가르쳐준 해입니다. beat a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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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요. GUA 또 한번의 oH iva
것 저것 AGS 헤가면서 역학생운동이 BA 운등0
같은 Lo] 생각이 납니다. 97년 공대 seay 으로 2a ade] 지금의 AB dae 가
고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철이 들었다고 해도 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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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10월 2일.
저의 일생을 결정지었던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종여학생회장으로 나설 AS 결의하였던 날이
yes 선거투쟁, 여학생회에 대한 다시 원초적인 고민들, 선배들도 똑같이 들었을 학우들의 비판의
소리, 그러나 아직도 여학생운동은 변한 것이 없는 것같다? 동지들의 사랑을 많이 ERA 선거기간이
였습니다.
Age 가끔 그 날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SYS FUE 간부로 결의한 사람들의 신념과 빵에 갔다오고
나서도 결의를 한 사람들, 수배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간부로 결의한 사람들의 강인함을 잊어버리고 일상
에 젖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구속자와 수배자의 상황을 항상 보면서 A 자신을 채찍질하려합
니다. 아직도 5만여학우의 대표로보다는 8천여학우의 대표로서가 더 익숙하지만 어떤 어려움에도 어떤
난관에도 전 이겨 나갈 수 있으리라고 감히 여러분앞에 결의내고자 합니다. 결의서가 어떤 결의보다는
저의 운동과정을 평가하고 총화했던 그러한 FAA 것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판단만이 남았습니다.
오
비가
11기 남녀대협을 세우고자 나선 김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