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
- 137-6.15공동선언 2주년과 민족자주통일운동의 과제
- Summary
- 6.15 공동선언이 합의된 지 2주년이 되었다. 전쟁과 평화, 분단과 Sas 가름하는 각계각충의 각축이 점차 가열되는 현 시점에서 615 공동선언 LFS 돌아보고 향후 민족자주통일운동 AY 과제를 언급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 Description
- --- page 1 ---
6.15 공동선언이 합의된 지 2주년이 되었다. 전쟁과 평화, 분단과 Sas 가름하는 각계각충의 각축이 점차 가열되는 현 시점에서 615
공동선언 LFS 돌아보고 향후 민족자주통일운동 AY 과제를 언급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1. 6.15 공동선언의 이행 과정
) 민족 공조와 외세 공조의 각축
6.15 공동선언의 핵심은 6.15 선언 4 1항이다. 6.15 선언 1항에서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은 '통일문제의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해 가자'고 약속했다. 이는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근본 원칙과 관련된 문제로 6.15 선언 clo] 성패를 좌우하는
기본 문제라 할 4 수 있더 있다.
6.15 선언 직후 새롭게 등장한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조미간의 약속 이행을 거부하는 한편 6.15 공동선언에 대한 노골적인
훼방과 간섭에 나섰다. 2000년 12월 평양에서 열린 4차 장관급회담에서 남측은 Ho] 악속했던 전력 ass 거부했다. 정세현 당시 통일
부 차관(현 통일부 장관)에 따르면 미국이 이에 반대했다고 한다. 마국은 Wold 2월 금강산 관광 댓가로 이북에 지원한 4억불이 군사
용으로 전용되었다고 주장하며 남북화해 협력의 상징인 금강산 관광에 홈집을 내기 시작했다.
부시 행정부의 내정 간섭의 정점은 3월 초에 있었던 한미 정상회담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봄 김정일 국방위원장
의 답방을 시사하며 미국으로부터의 협력을 구했다. 이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김정일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과 함께 이를 거부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Hoos Sots 2 RAZ 내외의 기대를 cee 통일정세는 급속히 냉각되기 Az
9.11 참사 이후 미국의 호전적인 대북 강경책으로 통일정세는 날로 심각성을 더해 가고 있다. 미국은 MIS '전쟁의 해'로 규정하며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공안 정국을 조성하고 있고 이북을 '악의 욱이라 지칭하며 대북 Sls 강화하고 있다.
최근 강화되고 있는 미국의 대북공작은 미국의 대북 강경노선이 위험 FES 넘어 서고 USS FHS] 보여 주고 있다. 중국 주재 대사
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잇따른 '탈북자 소동', SAA 붕괴설, '괴선박' 인양 Sol 일련의 사건 진행과정에서 미국은 수단.방법을 가리
지 않고 인위적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반목과 as 격화시키고 있다.
6.15 궁동선언 이행이 난관에 봉착한 것
있다.
6.15 선언이 나온 직후부터 조선일보, 한나라당 등 수구보수 세력은 615 선언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에 나서기 시작했다. '퍼주기론'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확대,강화되고 있는 수구보수 세력의 저항은 마침내 Mod 5월 22일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6.15 선언을 폐
기할 수도 있다'는 발언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수구보수 세력의 저항은 2002년 대선을 겨냥한 계산된 행동이라는 점에서 향후 더욱 강
화될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정부 또한 민쪽 공조와 민쪽대단결이라는 통일원칙에서 끊임없이 이탈함으로써 스스로 SBS 파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노골적
인 대북 강경노선을 견지하여 6.15 선언을 사실상 사문화하려는 조건에서 김대중 정부의 선택은 국민 대중, ?천만 겨레의 YS 믿고 대
담하게 민쪽의 자주와 대단결에 나서는 것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는 시종 저자세로 일관하여 6.15 공동
선언 이행의 대중적 SAS 창출하는 a 실패하였다. 45 임동원 특사 방문시에 김대중 정부가 보여 준 ‘Us 공조'와 한미일 동맹체제
는 모순되지 않는다는 요지의 설명은 김대중 정부의 처지가 얼마나 옹색한 위치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구반통일세력의 준동과 함께 6.15 선언의 당사자인 김대중 정부의 동요에도 Ae 관련이
2) 인도적 사안과 교류협력의 확대
2000년 8월부터 올 4월까지 진행된 남북 이산가족간의 만남은 우리 민족이 서로 갈라져 있지만 하나의 민족, 하나의 형제임을 느끼게
불과 1~2년안에 전개될 다음의 두가지 변수가 향후 수십년간의 역사를 좌우할 것이다. 첫째는 2003년 조미 제네바 합의를 둘러 싼 조
미간의 각축과 둘째는 2002년 대선을 포함하여 남측에서의 민쪽자주통일운동의 확대 발전의 정도이다.
MOBS 조미 AAS 이미 시작되었다. 현재 접점의 수준은 미국의 대북 압박 공세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와 동북이시아에서
긴장과 JAS 격화하고 있는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과의 첨예한 외교적 마찰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강경파들
은 탈북자의 기획망명을 조장하고 '괴선박'의 UGS 강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하에서 아마도 군사적 차원의 대결 양상이 예상
된다.
반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탈긴장, 협력 BAS 구축하여 미국의 대결 노선을 완화하려는 노력 또한 구체화되고 있다. 조중, 조러간
의 :관계가 급잔전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조중러를 연결하는 반미 패권연대가 가시화되고 있는 점과 이북과 유럽연합간의 관계 발전도 주
목할만한 점이다.
남즉에서의 정치적 역관계의 변화 또한 향후 정세의 중요 변수이다.
통일정세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의 대북강경노선에 편승하여 남북 대결을 부추기려는 친미보수우익세력과 평화공존.화해협력을 주창하
는 중간 세력,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지향하는 자주통일세력을 삼분할 수 있다.
현재 정세는 민주와 개혁. 보수와 수구라는 전선이 하나의 전선이라면 이 전통적인 전선과 함께 점차 통일정세에 대한 입장 차이가 위
전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522 관훈클럽 토론회에서의 이회창의 발언은 2002년 대선을 단순히 서민대 귀족, 개혁대 보수의 구
도가 아닌 통일정세를 둘러 싼 진보와 보수의 장(정확히 표현하면 통일과 수구반동이다.)으로 만들려는 정략적인 의도이다. 민주와 개혁
을 지향하는 정치 세력 또한 수세적인 관점에서만 지자제, 대선에 임하려는 HEE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민족자주통일운동 진영의 과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을 대중화하는 한편 이를 연북대단결 의식으로 지향시켰야 한다. 이미 대중화에 접어 는 반미반전 운동을 범국민
적인 대중운동으로 확고히 발전시켜야 하며 이와 함께 이북이 한민족, 한동포라는 대중적인 교양 사업을 광범위하게 진행해야 한다.
.돌째는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박는 외세와 수구보수세력을 제압해야 한다. 미국의 내정간섭, 정치 공작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
의 미래는 없다. 결사의 각오로 외세의 민족 분열.대결 기도에 맞서 싸워야 한다.
수구보수세릭을 제압하는 FA] 경우 두가지 WHS 경계해야 한다. 하나는 민주개혁을 지향하는 세력과의 연대와 연합을 소홀히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와 개혁에 경도되어 자주통일 VES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미 ake 밀접히 연관되고 있다. 이를 여하히 효
과적으로 결합하느냐의 문제가 운동 역량의 우세를 보장하고 수구보수세력을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Hoe 이러한 모든 운동의 성과는 6.15 공동선언으로 집약되어야 한다. 6.15 공동선언은 AUS, 일국가를 지향허는 민족통일기구를 건
설하고 이 기구를 무기로 하여 민족의 단합과 SVS 비상히 강화시킬 수 있는 WS 열어 놓았다. 논리적으로 보아도 외세의 ele 차
단하고 남측에서 수구보수 AS 제압하기만 하면 속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순탄한 ASE 타고 전진하게 되어 있다. 모든 운동올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운동으로 집약시키며 특히 6.15 공동선언에 대한 의식화 사업을 백방으로 강화해야 한다.
3. 글을 Bon
정세는 ASAD 상황은 날로 심각성을 더해 가고 있는 wal 승리와 격동의 가능성 또한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부시방한 반대 투쟁 과정에서 보여준 반미자주화운동의 성장은 조만간 반미자주화운동의 대중적 앙양을 예고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맹목적인 냉전 대결 논리가 Sete 시대는 지나갔다. 자주와 통일, 민주와 MAS 요구하는 세력의 YAS 이미 역사의 대세이다. 그리
고 이러한 대중적 기세와 ABS 하나의 Sle 역량으로 ASS 수 있다면 SUS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6.15 선언의 위력과 생활
력이 바로 이것이다, 6.15 선언은 통일로 가는 ALS 대단히 가까운 곳에 옮겨다 놓았다, 6.15 AUS 기치로 가까운 Gedo] 조국을 통
일하자.
6.15시대 조국통일 실현 경로에 대해(시론)
8002 Ye 민쪽동일일꾼 수련희 tea (Po "4
해준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남북 이산가족간의 만남은 우여곡절을 Arle 했저만 대체로 5차 이산가족 ASS 계기로 금강산에서 0626
적인 면회소가 설치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인도적 과제는 미송환된 비전향장기수를 송환하는 문제일 것이다.
다른 한편 남북간의 교류협력 문제는 정체 상태에 있다. 철도 도로 연결 구상, 임진강 수해 방지 대책, 동해안 어장 개발, 금강산 -
활성화 등 Se 남북간의 교류협력 사안들은 Fale AAS 보지 못한 A 표류하고 있다.
최근 주목되는 경향은 여전히 남북간의 근본적인 정치적 쟁점은 남아 있지만 남북간 교류협력이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Be
특히 남북과 함께 러시아를 연결하는 일련의 철도, 도로 연결 구상은 해당 사안이 갖고 있는 상징성으로 보나 경제적 파급 효과로 '
남북 교류협력이 본격화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발전은 남북간의 교류협력이 지역적인 차원의 경제 협력과 맞물리!
동북아시아 전체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남북간의 사회문화적 교류는 일련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2000년 ]0월 북측 조선노동당 HE 행/
남측에서 ago] 참관한 데 이어 노동자, 농민, 종교인 동의 부문별 교류와 함께 DMI 민족통일대토론회, 민족통일대축전 go] 행/
연이어 벌어집으로써 남북의 민간 차원의 연대연합은 점차 확대.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남측에서 반미 의식이 고조되고 이:
대한 대중적 인식이 개선됨에 따라 조만간 대중적인 추세로 자리잡을 것이다.
3) 통일방안을 둘러 싼 각축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615 선언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동일방안에 대한 합의일 것이다. 남과 북의 최고 지도부는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
연방제의 공통점이 USS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추진해 가기'로 합의하였다.
다소 모호한 문투로 되어 있는 2항의 통일방안에 대한 Bole 다음과 같은 쟁점을 담고 있다. 연합제안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 모두
AL 외교권 등 국가의 핵심 권한을 각각 남북이 갖되 남북을 연결하는 느슨한 기구를 형성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남측의
합제안은 위 기구를 연합기구라 규정하려 할 것이고 Feel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이를 민족통일기구라 위치지우려 할 것이다 전:
후자의 차이는 전자가 TWO KOREA 상태라면 후자는 ONE KOREA 상태이다. 전자가 IS 공조와 같은 근본적인 정치적 쟁점은 :
한 은폐하고 교류협력을 우선하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설사 남북이 현재 조건에서는 느슨한 기구로 묶일지라도 USA 지향과 지:
aa 하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차이를 갖 갖고 있다. 전자의 입장이 어떻게든 미국과 국내 기득권충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한 채 북의 변:
기대하는 발상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후자에 따르면 민쪽동일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 Awol 불가피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
민족공조냐 외세의존이냐 하는 G15 선언 1항의 근본적인 정치적 쟁점과 멕을 같이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WY SAS 외세의 대정 간섭과 함께 위의 쟁점에 대해 남북이 의견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관:
될 것이다.
2. 6.15 선언의 진로와 민족자주통일운동 진영의 과제
1) 6.15 공동선언의 진로
615 공동선언은 종국적으로 1항의 원칙, 민족공조의 원칙이 관철되는 가운데 이를 구체적으로 담보하는 민족동일기구가 건설되는 :
로 퀴결될 것이다. 민쪽통일기구는 현 상태를 반영하여 군사, 외교권올 남북이 각각 갖지만 일민쪽, 일국가를 대표하는 중앙기구로 _
AUS 하게 될 것이다. 민족 공조의 Mao] 확인되면서 민쪽과 국가를 데표하는 중양기구가 출현한다는 것은 초보적인 형태이기는 .
지만 조국동일국면으로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민쪽통일기구는 남북의 정부 당국자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 구성될 것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인다
위에서 Tae 바와 같이 민쪽동일기구는 65 선언 ]항의 원칙이 관철되는 기구이므로 순조롭게 건설될 수 있는 껏이 아니다. 3
민족의 공조에 반대하는 외세의 개입과 간섭을 막아내야 하며 SAS 민쪽의 대립과 반목을 부추기는 보수수구세력을 제압하고 '
공조의 원칙에 동의하는 통일지향적인 남측 주체가 출현해야 한다. 따라서 6.15 선언의 종국적인 귀결로서의 민족통일기구의 Sale
ae 제압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민쪽의 자3
2) 민쪽자주동일운동의 과제
6.15공동선언의 이행을 강력히 요구하는 2002년 |
통일애국진영의 단합으로 6.15공동선언 이행을 전면화해 나가자 Ill
글 순서 :
1. 조국통일 실현방도에 있어서 6ㆍ15공동선언의 의미
2. 6.18공동선언의 파격성, 주동성에 대한 이해는 조국통일 전면화를 위한 사상이론적 기초
36-15 공동선언의 역할
4. 6 ㆍ15전선 전면화의 정세적 배경
5,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
6 연방 연합방식의 통일실현과 진전을 위한 조건
7. 2002년 통일애국운동진영의 AS 대하여
조국통일보다 더 절박한 문제는 없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조국통일의 길에는 우리가 목숨처럼 들고 가야 할 조국통일대 원칙과 6.15공동선언이 %
조국동일은 본질적으로 보면, 외셰에 의해 인위적으로 갈라진 민족의 혈맥을 다시 잇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음 이룩하는 문제이며. .
의 지배와 간섭을 종식시키고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의 자주성울 실현하는 문제로서 조국통일의 주체든 천만 전체 민쪽이나.
조국을 하루빨리 연방연합방식으로 동일하는 것만이 민족의 주권과 자주성을 회복하여 강위릭한 퉁일민족대국을 건설하는 유일한 |
다
이 글은 두 가지 실천적 이유에 의해 작성되었다.
하나는, 6.15공동선언이 향도하는 정세의 주동성과 그 이행의 절박성을 각인함으로써 2000년의 운동을 보다 확신있고 전망성있게 wa
가기 위함이며,
하나는, 6.15궁동선언이 밝힌 조국통일실
수립해 | 나가기 .
과격적 경로를 을바로 이해하고, 이에 따른 6.5시대에 변화된 조국동일운동의 전략전:
6.15공동선언은 정세판도에서 운동방법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폭넓고 심오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은 일꾼들이 이구동성으로 무언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기는 한데 그것이 요구하는 운동의 새로운 전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본
이고 체계적인 이해의 부쪽함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조국통일운동의 획기적 진전을 이루어 내기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6.15시1
변화된 요구는 운동의 양적 성장과 동시에 질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시론적 성격의 문서임을 밝히며, 6.15정세가 가져 온 새로운 변화에 부응한
를 충심으로 기대한다.
운동의 개선ㆍ강화를 위해 힘있는 토론이 전개'
1. 조국통일 AVILES 있어서 6 15공동선언의 의의
1) 1012 조미공동코뮤니케가 조국통일을 위한 국제적 조건과 환경을 결정적으로 마련하는 것이었다면, 6.15공동선언은 우리 민족
힘을 합쳐 통일의 문을 열자는 자주노선과 민쪽역량의 주동적 역할을 전면에 내세우는 민쪽방침이다.
2615 궁동선언은 현 사기 조국통일을 가장 빠르고 쉽게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6.15공동선언은 조국통일촉진과 조국통일의 실현이라는 역동적이고 상숭적인 일련의 과정올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조국통일촉진의 방법이란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 민족구성원간의 정치적 연대와 AHS 망라하는 것이다. 즉, 우리 민족끼리 힘은
--- page 2 ---
A 통일의 문을 열자는 기치 아래 전민족의 역량을 전방위적으로 극대화하는 방첨을 말한다.
조국통일실현의 방법이란 낮은 단계 연방제와 연합:
2. 6.15공동선언의 파격성, 주동성에 대한 이해는
조국통일 전면화를 위한 사상이론적 기초
1) 6.15공동선언을 실현하여 조국을 통일하자는 말은 상호 통일방안의 공통성에 근거하여 연방연합방식으로 통일하자는 것이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낮은 단계 연방제보다는 더 이완되고 느슨한 방안이다. 그러나 연방연합방식과 낮은 단계 연방제의 차이를 논쟁화 하
는 것은 그다지 실천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조국통일의 출발점에서는 제도상의 형태보다는 통일의 역동성을 담아 내고 민족
Bae FERS 살려 이 방량메서 USSU TE 세워 TASS 동임을 이쿠겠다는
동일 국가적 성격을 지향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하기 매문이다.
연방연합방식이란 정치ㆍ외교ㆍ군사 등의 권한을 남북 각각이 대체로 갖고 있으면서 우선 남북당국 사이의 대화와 협상을 추진하고 다
방면적인 민족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는 하나의 민쪽통일 기구를 수립하자는 말이다.
동일방안과 제도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의 차이는 정처 ㆍ외교ㆍ군사 등의 AHL 지역정부가 갖는가, 아니면 통일중앙정부가 갖느냐의
차이다. 다시 말하면 중앙정부(또는 통일기구)가 민족시책에 대한 전국적 범위의 지휘권을 얼마나 갖고 있으며, 동시에 지역정부에 대한
저도적 역할을 얼마나 갖느나에 의해 규정된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 차이를 규정하는 BAA 것은 남측정부의 성격이다. 한마더로 말해 남측에 자주적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높은 단
계로 가는 것이고 그 이전에는 낮은 단계로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용안정과 노동3권 보장, 서민생활의 안정 및 복리증진, 진보정당활
동의 자유, 자주정치 SS 시행하는데 있어서 중앙정부와 지역정부가 대립하고 갈동한다면 높은 단계로의 이행이 더디게 된다.
2) 6.15공동선언은 조국통일 실현 경로의 매우 중대한 변화를 가르쳐 주고 있다.
------ (6.15공동선언의 파격성)
종래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남측의 민쪽자주정권의 수립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주한미군 ATH 각종 외세매국잔재의 일소, 반통일악법과 기구의 철폐, 민생민권의 민주정치실현, 각종 불평등 국제조약의 폐기 SSS
내용으로 하는 민족민주변혁이 연방제 실현의 전제로 되어 있었다. 또한 연방중앙정부 수립에서 전민족적인 균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경
로와 방법을 취하였다.
이에 반해 6.15공동선언은 민쪽의 이익을 중심에 놓고 민쪽단합, 민족공조를 통해 가장 빠르고 쉽게 통일하자는 것이다. 즉, 일정한 과도
성을 전제로 한 연방연합방식(200]년 2월 범민련 공동의장단회의에서 정식화된 개념)의 민족통일기구를 수립하여 전반적인 민족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여기에 전 민쪽의 참여를 보장하여 높은 단계로 나가는 경로를 택하고 있다.
즉, 민족자주정권수림 + 연방제 실현의 경로가 아니라 6.15공동선언 ?항에 근거한 민쪽통일기구의 수립 > 남측에서의 자주민주정부의
수립 > 높은 단계의 통일로 이행이라는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조국통일 실현 경로의 변화는 조국통일운동의 전략전술적 WHS 의미하며, 이는 민쪽민주운동진영에게 6.15이행운동을 전면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때문에 6.15시대에 적합한 반미운동의 관점과 형식의 변화는 대단히 첨여한 쟁점으로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3) 그렇다면 6.15공동선언이 갖는 정세와 운동의 주동적 측면은 무엇인가?
많은 일꾼들이 6.15공동선언에 대해 궁금한 것은 왜 남측에 자주민주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연방연합방식(북측의 표현으로 하자면 낮은
단계 연방제)으로 SUS 하려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실현 가능하겠는가의 문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는데 유리한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 6.15공동선언의 주동성 1)
4, 연방연합방식에 따른 민족통일기구의 수럼은 주한미군의 주둔근거 및 미국의 노골적인 정치개입과 간섭, 정전협정, 각종 불평등협정
동 미국에 의한 분단의 정치군사 지렛대를 제거하고. 반통일악법과 기구, 주적론, 외세공조 등의 반북케제와 이데올로기를 혁가할 결정적
인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된다 00000, 00000
민쪽통일기구수럼에 참여하게 되는 남측정부는 민쪽의 이익을 중시하며, 민쪽공조에 나서는 최소한의 통일지향적 민주주의 정권이다. 그
리고 극소수반통일분열세력을 제외한 대다수의 6.15공동선언 지지세력들은 광범위한 민족역량으로 편재되어 6.15공동선언의 이행을 족구
소련이라는 상대가 없어진 탈냉전적 상황에서 미국은 끊임없이 새로운 명분과 적들을 개발하여 일극패권주의를 강화하는데 광분하고 있
다
미국의 미사일이 내일 우리의 머리위로 떨어질 수 있음을 똑똑히 보고 있다. 명분도 CAE 없는 개입과 전쟁확대로 일관하는 미국의 호
전책동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SAS 초래할 WAS 조성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미국의 침략성올 경계하는 동시에 허장성세하는 취약성을 동시에 간과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동북아 정세의 방향타는 이
북동포와 이남의 진보직 애국세력에계 쥐어져 있다. :
7천만이 단결하면 우리 민족은 그 무엇도 능히 해낼 수 있다.
이남의 식민화가 더욱 심화ㆍ전면화되고, 이북 무력화 책동이 첨예화 되며, 한반도에 대한 새전쟁책동이 고도화되고 있는 정세적 조건에
서 7천만의 단합된 BS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최고의 동력문제로 대무되고 있다.
새전쟁책동을 분쇄하고 조국통일의 활로를 보장하는데는, ?천만의 대단결, 이북의 선군자주노선, 조중ㆍ조러연대의 강화, 반미반전의 국제
A 저항과 여론 둥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러한 측면들을 유지하고 강화해주는 근간이 6.15공동선언이다. 때문에 6.15공동선언은 당면시
기 가장 힘있는 전민족투쟁전선의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6.15공동선언이 동북아시아의 반미전선을 지탱하는 기본정치입장으로 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6.15공동선언을 이행하는 것은
조국통일전선과 동북아 반미전선을 동시에 사수해내는 관건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점을 볼 때 6.15공동선언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D 민쪽대단합의 헌장, 반미반전을 위한 전민쪽투쟁전선의 공동기치
(8) 미국의 일극패권주의 분쇄를 위한 다극화ㆍ국제적 반미반제투쟁전선의 기치
-. 반미반패권을 위한 조중, 조러 관계의 지탱점
-. 국제우호친선관계의 전방위적 지지
4. 6.15전선 전면화의 정세적 배경
새세기 새 전쟁책동에 종지부를 찍고 살육참화로부터 민쪽구원의 AS 개척하고, 외세간섭의 사대매국으로부터 자주회생의 SYS 밝히
며, 반통일분열의 악순환으로부터 대단합의 새조국을 건설하자는 ?천만의 절대절명의 의지가 동북아 정세를 자주로 평화로 움직여가는 기
본 역량이요, 확고한 중심으로 우뚝 서있다.
오늘의 정세는 ?천만의 강력한 대단결을 시급히 요구하고 있다.
오늘의 정세는 ?천만의 단일한 반미반전투쟁전선을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오늘의 정세는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는 투쟁에 용약분기해야 함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의 정세는 조국반도에서 조국통일전선(= 6.15전선)의 위력성과 정당성 그리고 현심의 절박성을 강력히 입중하는 상황으로
되고 있다.
민족공멸이냐 공존이나, 통일이냐 분열이나, 자주냐 완전한 예속이냐를 가르는 절대절명의 목전에서 자주와 대단결의 확고한 기치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히 요구되고 있는 바, 여기에 바로 6.15공동선언을 이행해야 할 전면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5.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
1)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의 [단계는 남과 북이 각각 외교ㆍ군사권을 갖고 남북 정상이 만나는 남북 정상회담, 또는 남북 각
료회담, 남북 의원들이 만나는 남북 평의회 SS 묶어 연합기구를 건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를 공화국연합제 dale} 표현하고 있
는데 법적으로는 국가연합이다. 즉 2국가 ]연합기구 상태이다. 남측의 연합제안이란 대체로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의 1단계를
의미한다.
김대중정권의 SALAMA 연합기구)에서 연방제(]연방정부 2지역정부)로 가는데는 다당제, 자유선거제, 시장경제체제의 도입 동의
전제조건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는 오랜 분열로 인한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무시하고, 남과 북의 독자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 되며,
하고 강제해 나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남측의 자주화를 앞당기며 자주민주정부수립의 역동적인 계기와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
될 것이다,
4) SYS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에 의한 BAA BPRS 최소화하고 민족역량의 역할을 극대화해야 한다. --- (6.15공동선언의
동성 2) :
Orda] 조미관계의 SAS 1012 조미공동코뮤니케에 집약ㆍ집중되어 있다. 이는 한반도에서의 민족자주노선의 승리인 동시에 ah
전략적 패배를 의미하며, 결국 통일의 문제는 민족내부문제라는 자주적 해법만 있으면 통일의 문은 열리게 됨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ㅇ
다
미국은 선행정권의 정치적 합의를 백지화하고 힘에 의한 대결정책을 강화하는데 WHS 쓰고 있다. 정세는 긴장되고 엄중하나 615
선언의 전민족적 기치를 높이 들고 Ads] 대단결음 굳건히 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성스러운 민족통일대행진을 결코 막아
수 없다
5) 6.15선언은 연대연합운동의 SHES 가져 왔다. 특히 중간세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이에 대한 연대연합운동의 개선ㆍ강화를
----- (6.15공동선언의 주동성 3)
민족역량의 압도적 성장과 정치적 향상은 6.15공동선언 이행의 주체적 조건형성의 첫째가는 과제다. 이는 이전 통일운동에 노정되(
민쪽대단결의 관점과 방법에서의 대대적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6.15공동선언은 민족대단결 운동의 전면적 쇄신과 강화를 주동적으로 불러 온 Sq 활동방침이 된 것이다.
6) 민족의 자주권이 없으면 그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주인답게 살 수 없다.
민쪽의 자주와 SUS 가로막으며 대결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주범은 미ㆍ일 제국주의다.
이 땅의 경제식민화와 민생파탄, 부패정처, 양키왜색문화가 판치게 한 주범도 미ㆍ일 제국주의다.
미일 외세가 4천만 이남 US] 자주적이고 평둥한 as 실현하는데 결정적인 걸림돌인 동시에 ?천만 민족의 융성ㆍ번영한 통일조:
건설하는데도 결정적인 걸림들이라고 할 때, 4천만의 힘이 더 센가 아니면 7천만의 단합된 힘으로 몰아 내는 것이 수월한가? 당연히
족적 투쟁이 더 힘있고 더 수월하다. 조국통일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민족자주화를 이루는데 있어서 전민족적 관점과 전국적 관점을 :
Of 하는 전략전술적인 이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6.15공동선언은 이 망에서 외세를 몰아내는데 alse] 공동투쟁전선을 더 빠르고 ㄷ
있게 구축할 수 있는 조건과 이유를 강력하게 만들어 주었다. ----- (6.15궁동선언의 주동성 4)
7) 조국통일의 전면화는 이남 사회변혁운동 발전의 모든 정치적 조건(이남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전진시킬 수 있는 정세적 조건고
기 등) 및 독자성을 중시하면서도 USS] 이익과 요구를 무엇보다 앞세우고, 전민족적인 자주화를 실현해 나간다는 관점, 태도와 운동!
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6 .15공동선언은 '우리 민족끼리 YS 합쳐 통일의 문을 A= 전민족적 호소아래 '민쪽역량의 FEA 역할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
로써 객관정세의 유ㆍ불리를 뛰어 넘어 조국통일의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때문에 6.15공동선언 이행의 기치아래 교류와 협력, 화해와 단합, 각계각충의 정치적 연합을 이루는 운동을 더욱 힘차게 벌이는 것은
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앞당기기 위한 운동으로 되는 것이며, 이는 이남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민권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신장시커 1
데 기여하게 된다.
3. 6.15공동선언의 역할
NOE 10.13 조미공동코뮤니케는 Wedd] 조미격돌을 우리 Aso] 승리로 마감한 역사적인 쾌거였다. 그러나 부시의 등장은 역사적?
전과 승리를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무모한 시도를 가져 왔다.
테러박멸을 앞세운 아프간 YS AAMAS 전쟁의 회오리로 격농시카고 있으며, 이는 이라크를 거쳐 이북으로의 확전의 가능성을 1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사실상 자본주의의 지배주의와 팽창주의를 관철하는 내용이다. 때문에 조국통일 3대 원칙에 기초하고 공존, 공영, 공리를 Fas
6.15공동선언에서는 김대중대통령의 2단계안을 배제하고 있다.
6.15공동선|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이
업 2항 |서로 공통성이 USS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김대중정권
의 연합제 현존하는 남북의 두 정부는 독립국가로서의 권한, 즉 외교, 국방, 내정의 aes
그대로 유지한다. 그리고 양 공화국에서 같은 수의 대표를 파견하여 공화국 연합
nen : 기구를 구성한다. 공화국 연합기구의 APE 3원칙(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
mum 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며 여기에서의 의사결정은 만장일치로 한다.(91년 49)
북의 낮은 1민족 ‥1국가ㆍ2 제도ㆍ2 정부의 대원칙에 기초하되 북과 Yo] 존재하는 두 정부
단계 가 정치ㆍ군사 ㆍ외교권을 비롯한 현재의 기능과 AUS 그대로 가지게 하고 그 우
연방제 에 민족통일기구를 ULE 방법으로 민족공동의 이익에 맞게 북남관계를 통일적
는 으로 조정해 나간다. (2001년 2월 11일 평양방송)
고려민주연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ALS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
방공화국 초위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내오고 그 밑에서 북과
창설 방안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을 창럼하
느 |여 조국을 통일한다.(80년 10월 10일)
2) 91년 북의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에서 <우리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
로는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통일을 점차적으로 완
는 문제도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천명하였다.
이어 2000년 10월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안경호 부위원장은 <낮은 단계 연방제는 현재의 남과 북 두 정부의 정치ㆍ군사ㆍ외교권 ㆍ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민쪽통일기구를 두는 방안>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또한 북은 2001년 2월 11일 평양방송을 통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하나의 민족ㆍ하나의 국가ㆍ두 개의 제도ㆍ두 개의 정부의 1
칙에 기초하되 북과 남에 존재하는 두 정부가 정치ㆍ군사ㆍ외교권을 비롯한 현재의 기능과 ARS 그대로 가지게 하고 그 우에 민족.
기구를 ULE 방법으로 민족공동의 이익에 맞게 북남관계를 통일적으로 조정해 나가는 것을 기본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3) 6.15 선언 3항에서는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점을 인정하고 이러한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가:
합의하였다]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점이란 남과 북이 각각 외교. 군사권 등 국가주권의 핵심적인 A
갖는 상태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각급 차원의 대화와 논의의 SS 제도화하는 형태상의 공통점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6.15 선언의 AMS 남과 Fo] 외교, 군사권 등 국가 FA 핵심적인 권한을 가진 상태에서 상징적이거나 제한적인 Was
는 통일기구를 수립하는 것이다.
4) 민쪽통일기구 TAS 전후한 국면에서의 민쪽주체역량의 역동적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조국통일이란 남과 HS 포괄하는 범민쪽적인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상장적이거나 제한적인 권한이기는 하지만 민쪽통일기구가 수립된다는 것은 조국통일의 초기 국면으로 진입함으로써 높은 단계의 .
SUS 위한 유리한 SUS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FHS 대표하는 단일한 민족통일기구는 자주ㆍ평화통일ㆍ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라 조국통일의 AS 강럭하게 추동 할 것이다. MELE 조국통일은 획기적이고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게 될 것이다.
때문에 민족통일기구의 제한성이나 과도성, 불안정성 Sol 주목하기보다는 민족통일기구의 역동성과 전망성에 실천적 Pas 신는
이 중요하다.
민쪽통일기구의 수립은 남북당국대화의 정례화, 전면화를 우선 가져 을 것이며, 화해와 단합 ㆍ교류와 BAS 위한 각 분야의 |
잇따르게 될 것이다, 자주통일의 여건 마련을 위해 각종 정치군사적 의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며, 이 과정에서 특히 TSH.
비롯한 주한미군의 존재문제가 초미의 문제로 될 수밖에 없다. 각종 SYS 조약과 협정의 개폐를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지게 될 we
--- page 3 ---
주한미군 관련의 수많은 피해사례(인명, 재산, 환경 sol 대한 진상조사와 처벌 및 보상요구운동이 SAK 일어날 것이며, 민족통일기
구 훈영과정에서 각계각충의 의사와 요구를 집결시키고 판철하기 위한 군중적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이러한 운동은 도동
자ㆍ민중의 민주, 민생민권 확보투쟁과 결합되어 이남사회변혁의 중대한 Aas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남측 정권과 남측 각
계세력들과의 Beat 경쟁이 더욱 거세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선도하고 지휘하는 것은 범민족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적 요구와 정세적 힘이다.
이 정세 시기 자주와 통일을 위한 민족의 기운은 그야말로 파죽지세, 만화방창의 기세로 될 것이다.
5) 범민련의 강령ㆍ규약 개정은 몇 가지 개념상의 변화가 아니라 6.15공동선언의 새로운 요구에 맞게 범민련 운동을 개선ㆍ강화하기 위한
능동적 조치이다.
6.15공동선언을 범민련의 총적 활동 자침으로 삼는 다는 것은 하루빨리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6.15공동선언을 지지하는 모든 세력과의
폭넓은 대단합운동을 벌여. 내는데 헌신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6 연방연합방식의 동일 실현과 진전을 위한 조건
1) 내용을 중간정리하면, 민족통일기구는
1민족 1국가 AE 2정부에 기초하며,(통일국가로의 1국가성을 완전히 갖지는 못한다.)
정치ㆍ군사ㆍ외교권을 각각 가지게 하되,
남북교류와 협력 및 남북당국사이의 대화를 획기적으로 증진시키며,
대외적으로 하나의 통일국가로서의 상징성과 지향성을 강력히 선포하게 된다.
2) 연방연합방식의 실현은 민족공동의 이익을 무엇보다 선행시키려는 남측 당국의 태도가 세워저야 한다.
우리 민쪽끼리 YS 합쳐 통일의 문을 열자는 자주적 합의에 따라 민족단합과 공조의 편에 서야 한다.
3) 주적론의 폐기,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 등 6.15공동선언 이행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변시켜야 한다.
4) 민쪽통일정치협상회의(대민족회의)의 남측 조직정치적 기초를 구체화시켜 나가야 한다.
특히, 이남 통일애국운동진영의 정치적 단합과 합의수준을 각별히 높여야 한다.
5) 반미(철수, 군축, 평화운동)의 전략적 경로를 견지해야 한다.
주한미군철수와 관련하여 볼 때 주한미군철수의 청사진을 주동적으로 제시하고, 철수를 위한 국제적 합의를 마련하는 전략적 영역과 군
중을 의식ㆍ계몽화하고 조직하는 전술적 영역을 구분해 볼 수 있다.
남측에서의 반미운동은 전민특위, 미군범죄근절, 기지반환, 환경오염, 인명ㆍ재산피해보상, 한 미행정협정, 토지사용료 부과, 주한미군분
담금 폐지, 통일운동 방해중지, 전력ㆍ관광 등 민쪽협력사업에 대한 간섭 중지 See] 다양한 실천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면서 긴장고조ㆍ
전쟁책동 분쇄와 조미공동코뮤니케의 이행 So] 전략적 기조를 견지해야 한다, 6.15시대에 걸맞는 반미반전운동의 전개가 요구되는 것이
다
7. 2002년 통일애국운동진영의 대응에 대하여
1) 6.15공동선언 이행의 기치를 더욱 강력하게 들고 나가야 한다.
2) 운동대오의 단합의 Sele} 관건이다.
3) 주체역량의 강화와 편성이라는 즉면에서 보자면
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방,연합이 조국을 통일하는데서 민족통일기구를 두고 공존공영공리를 도모하는 SYS 한다는 점이며 일단 구성된 민쪽통일기
구가! 처음부터 정치, 군사, 외교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역정부가 정치, 군사, 외끄권을 갖고 점차적으로 정치, 군사, 외교권을 갖는
중앙정부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민쪽통일기구 구성은 1민족 1국가의 출발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민족통일기구가 구성되면 조국통일은 이루어지는 것이며 낮
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해야 할 과제가 주어지는 입니다.
그런 것으로 6ㆍ15 공동선언에 제시된 연방,연합안은 민쪽통일기구를 통해 하나의 동일국가를 건설하는 안이라고 하겠습니다.
2. 연방, 연합 통일의 경로
일반적으로 조국통일을 이룬다고 할 때 그것은 also] PS 모아 남북 정부, 정당, 사회단체 연합회의(대민쪽회의(가)) 같은 것을 +
집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민족회의(가)가 책임지고 전민족적인 AAS 진행해 연방의회를 구성하고 행정기관을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성되는 연방의회, 행정기관은 ass 대표하며 정치, 군사, 외교권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
보안법 철폐와 같은 조국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에 반해 연방, 연합 통일은 민족통일기구를 먼저 구성하면서 정치, 군사, 외교권을 지역정부가 갖되 이를 점차적으로 중앙정부로 이
전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연방, 연합 통일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격상 낮은 단계의 통일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연방, 연합 통일이 제기된 것은 전민족적인 힘이 미국을 압도해 가는 조건에서 어떻게든 빨리 조국통일을 달성하려는 취지이며
낮은 단계가 높은 dale 발전해 갈 수 있는 우리 민쪽주체의 힘에 대한 믿음과 정세에 대한 낙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민족통일기구는 ‘Fel 민족끼라'라는 자주적 원칙에서(조국통일 3대원칙, 6-15 SEAM 기본 정신) 운영되는 중앙기구로 하나의 민
쪽 하나의 국가를 대표하며 행정기능을 갖게 될 것입니다.
민쪽통일기구는 남북 정부간 협의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기에 그 구성은 주되게 남북정부로 될 것이며 정당, 사회단체의 참여는 부분적
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민족통일기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전민족의 자주적 단결이 이루어져 튼튼한 민족적 지반을 갖추어야 하며 남북관계가 “우리
민족끼리'라는 자주정신에 기초한 민족공조를 확고히 실현해야 합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내외분열세력을 타승해 미국의 지배와 간섭
의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구체적 과제로 민족대통일전선 구축, 민족공조 확럼을 위한 FAS 철회, 국가보안법 철폐, 남측에서 자주
화, 민주화의 진전, 북미관계 발전(북미평협, 주한미군철수 협의 alae) 제기되며 이것이 실현될 때 민쪽통일기구 Pye 현실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쪽통일기구가 6ㆍ15 SEAN 정신을 확인하며 통일기구로서 역할을 시작할 때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 두 개의
정부'로서 통일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민족통일기구 구성과 운영이 시작되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하기 위한 과제가 주어지며 핵심적인 Bake 주권기관 강화와
중앙정부로의 정치, 군사, 외교권의 집중이라고 하겠습니다.
핀쪽통일기구가 하나의 US 하나의 국가를 대표할 수 있지만 AISS 대표하는 주권기관을 강화하는 것은 발전을 위한 과제라고 하
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민족회의(가)3)가 열리고 이의 책임 하에 전민족적인 SAAS 통해 연방의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런 선거가 치러질 경우 민족대통일전선에 망라된 정치세력이 압도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중앙정부를 강화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노력 속에서 정차, 군사, 외교권이 중앙정부로 집중되어야 합니다. 남측의 자주화, 민
2) 연방제는 연방중앙정부를 연합제는 상호협력기구를 중앙기구로 가지는데 둘다 $US 실현하는 방안으로 공통성을 놓고 본다면 남북이
힘을 합쳐 중앙 APE 구성하고 그 기구가 조국통일을 실현해 간다는 것입니다,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하더라도 남북은 통일로 가기 위한 잠
정적 관계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남북이 YS 합쳐 공동의 중앙 기구를 구성한다면 그것은 SUS 지향하는 것이기에 이미 하나의 AS 하나
의 국가로 Svs 의미하며 이룸 민족통일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전민족적인 대표기관은 국회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민족통일기구가 구성되면 그것은 집행기관이면서도 전민족적인 대표성을 가질 AY
니다. 그러나 진민족적인 GRAS 너 높게 확보하려면 대민족희의(가) 같은 것이 소집되어서 진민족적인 Sans 진행해 전민족적인 대표
기관, 주권기관을 구성해야 합니다.
© 한총련, 한청 둥 조국통일의 선봉부대의 역할을 더욱 높여야 한다.
@ 노동자, 농민, 빈민의 생존권투쟁과 자주통일운동의 결합을 강화하며 전민중적 연대를 공고히 해야 한다.
@ 범민련과 전국연합의 지지협력관계에서 혈연적 연계로 강화해야 한다.
민쪽민주운동과 통일운동에 대한 역할분담론을 극복해야 한다.
@ 중간계충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적극적인 연대연합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 행사별 추진본부의 TES 넘어 범국민적 통일운동기구로 발전시켜, 정치적 전망을 구체화해야 한다.
© 통일연대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 범민련 조직의 일치성을 강화하고, 범민련 활동을 개선ㆍ강화해야 한다.
범민련의 합법화를 실현해야 한다.
4) 민족민주세력의 정치세력화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6.15지지ㆍ이행세력의 정치적 승리를 일관되게 견지해 나가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민족민주운동진영 일각에서 나타나는 6.15공동선언이 실종ㆍ무력화ㆍ사문화되었다는 견해를 단호히 극복하여 운동으
ARS 보장해 나가야 한다. 이남의 지자체 선거, 대선 등의 국면에 대한 적극적 대응속에서 친미보수세력을 고림시키고 6.15공동선오
행과 자주화ㆍ민주화 실현을 더욱 앞당길 수 있도록 전체운동진영의 공동행동 확보에 노력해야 한다.
6.15공동선언이 조국통일 전면화를 이끄는 AISA 방침이며, 이남사회 자주화를 선도하는 방향타라는 AS 명심하여, 6.15공동선오
행의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며, 이를 가로막는 제반 정치적 걸림돌을 일소하는 투쟁으로 모든 통일민주세력들은 공동행동해야 한다.
조국통일을 통해 전 USS] 자주권을 하루빨리 실현하지 못하면 이남은 식민지 노예의 처지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o}?
미, 일 제국주의로부터 끊임없는 정치 군사적인 간섭과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가장 원인적인 부분을 복구하거나 해결하는 것에 선차성을 돌리는 것이 과학이다.
조국통일의 전면화란 주체적 역량과 주어진 정세 조건에 기초하여 더 빠르고, 더 현실성있게 전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해 나갈 수 «
최선의 방도를 말한다.
6.15공동선언 이행하여 조국통일 앞당기자!
외세배격 민족공조 6.15공동선언 이행하자!
단결만이 살길이다. 모든 운동세력은 6.15공동선언 이행으로 총단결하자!
범민련 합법화 실현하여 연대연합의 a] 전성기를 불러오자!
6.15 공동선언에 대한 이해를 놓이자
2000 동일일꾼 전진태회 자료집 '
1. 6ㆍ15 공동선언은 민족자주, 조국통일선언이다.
6ㆍ15 공동선언은 민족자주, 조국통일선언입니다. 6ㆍ15 공동선언에는 우리 민쪽끼리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쟈'라는 민쪽2
정신이 민족대단결의 기초로 밝혀져 있으며 연방연합의 공통성에 기초한 통일실현의 Part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만큼 6 ㆍ15 공:
AS 전술적이거나 부분적인 Ato] 아닌 조국통일을 실제로 실현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방연합의 공통성에 기초한 통일실현의 의미를 알아봅시다.
연방제란 1민쪽, 1국가, WE, WHS 의미하는 것으로 연방중앙정부가 정치, 군사, 외교권을 가지며 지역정부는 상호체제를 인:
기초에서 운영된다는 것입니다.
연합제란 2국가에 기초한 BAS 실현한다는 의미로 정치, 군사, 외교권을 각정부가 갖고 상호 협력기구를 구성, Wis 협력을 추:
- 10 -
주화3) 과제 역시 중요하게 나선다고 하겠습니다.
대민쪽회의(가)가 가지는 이러한 의희로 해서 민쪽통일기구를 구성해 들어가는 단계에서부터 이를 소집하는 LES 전개해야 Yue
한편 대민족회의(가) 의제가 주권기관 강화가 아니라 조국통일운동의 활성화 방안 등과 같은 Bale 제시된다면 민쪽통일기구 수립
에도 열릴 수 있을 것이며 민쪽적 단결 강화와 이후 대민쪽회의(가)를 통한 주권기관 강화에 유리한 여건을 형성할 것입니다.
* 대민족회의(가) 역할; 주권기관 강화인가 민족통일기구 수럼인가에 따라 차이가 나설 수 있는데 이 글은 주권기관 강화를 기본 <?
로 하는 시론적 글임을 밝힙니다.
3, 자주적 민주정부수립과 관계
자주적 민주정부는 남측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민족자본가, 애국적 군인 SF 망라하는 얘국민주세력이 주축이 되어 +
자주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정부로 당면해서 한국 민중의 자주적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정권형태입니다. 자주적 민주정부는 +
자주, 민주주의를 이념적 기초로, 목표로 하며 자본주의체제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형1
정부입니다
자주적 민주정부 수림을 위해서는 민쪽민주전선과 합법정당이 필요합니다. 민쪽민주전선과 합법정당의 관계는 민족민주전선에 Hh
당이 하나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민쪽민주전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역량으로 합법적 axing :
하면서 전 민중적인 항쟁으로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럽하는 것이 자주적 민주정부 수림의 경로입니다.
사실 민쪽통일기구를 구성하더라도 그 운영은 자주적인 운영이 되어야 하므로 남측 정권의 자주화, 민주회9)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ae] 남측에 보수정권이 있다고 해도 자주통일운동이 강하게 압박한다면 자주화, 민주화를 진전시키고 이를 통한 민족동일기구 구-
가능할 것입니다. 6 ㆍ15 공동선언 채백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그 가능성은 충분히 확인됩니다.
그렇다면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은 민족통일기구 구성의 절대적 조건이라기보다 정권의 자주화, 민주화를 얼마나 실현해 a 수 Qe
하는 것이 민족통일기구 구성의 관건적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민족통일기구가 구성되면 남북의 단결과 자주적 권리가 확보됨으로 남측에서 자주적 민주정부 수럽을 더 앞당기리:
것은 명확합니다.
4. 2002년의 과제
그렇다면 이를 위한 2002년 과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민족통일기구 TAS 위한 6ㆍ15 공동선언 실천과 함께 자주적 민주정부수럼을 위한 민쪽민주세력의 태세를 준비하는 문:
니다
민쪽통일기구 구성을 위해서는 민족통일주체역량 축성과 남북관계 alas 자주의 궤도에서 힘차게 진행해야 하며 북미대결전에서
리를 확고히 쟁취해 미국의 개입, 간섭을 격파해내고 주적론, 국가보안법과 같은 분단의 법적, 물리적 장벽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번 대선에서 친미보수정치를 청산하고 6ㆍ15 지지세력의 SS 쟁취해 6ㆍ15 공동선언 이행을 더 본격적인 Ace! 진입시켜야 th
그렇게 된다면 6ㆍ15 공동선언 이행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평화선언, 만쪽통일기구 구성에 대한 합의로까지 진전되어 나갈 것입ㄴ
즉 조국통일을 선포하게 될 날이 가시권에 접어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민쪽민주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실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친미보수정치권 AWS Aol 민쪽민주세력이 주동이 되어 대
3) 연방연합에 기초한 통일이 진전하더라도 민족민주세력은 정권의 자주화,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며 자주적 민주정부수럽으로 |
of 합니다. 그것은 민족통일기구에 보수정권이 참여하는 경우 외세의 지배와 간섭이 완전히 척결되지 않으면서 남북대결의 BANS] :
남아 있게 되기 때문이며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독자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4) 6ㆍ15 공동선언 이행으로 조국통일이 현실화되어 간다면 반통일파쇼악법이 철폐되는 동 합법적 공간이 wold 것이며 이를 적국 활-
가야 할 것입니다.
5) 강력한 자주통일운동으로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민주화를 달성해 나간다면, 보수 정권하에서 민족통일기구 구성울
한 자주화, 민주화 진전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권의 자주화, 민주화 운동의 종국적 귀결은 자주적 민주정부라고 하겠습니다.
--- page 4 ---
서 6ㆍ15 공동선언 세력의 승리를 쟁취하고 민족통일기구 TIS 통한 자주통일실현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 민쪽민주세력은
자성을 견지하면서도 여러 정치세력과 연대와 단결을 도모해야 합니다. 당면 민족민주세력의 단결에 있어 민주노동당이 주요 Hor
작용할 것이며 이를 확대해 강고한 민쪽민주전선구축과 합법정당 건설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2002년 과제를 총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민쪽자주 기처, 6ㆍ15 공동선언의 기치 아래 Bae 전민쪽의 힘으로 남북관계 진전과 조국통일운동의 활성화를 바로 미국과의 대
결전
에서 Se 거두면서,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15 공동선언 이행을 높은 단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며 이 기세로 6ㆍ15 공동.
선언에 역행하는 반통일세력을
철저히 척결하는 것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244 과제로 민쪽대통일전선의 구축과 대민족회의(가)
에 대한 준비, 민쪽민주세력의 정치세력화 및 민쪽민주전선 형성 sol 요청되며 대중운동과제로 단결과 대중화, 6ㆍ15시대에 걸맞는 범
국민적인 운동의 창출이 요청됩니다.
<순서>
통일운동에 대한 남북한 여성들의 의식비교와 우리의 과제
한반도 통일과 여성
여성과 통일
6.15선언과 여성해방의 관계
속초 세 할머니가 겪은 6ㆍ25 전쟁
통일운동에 대한 남북한 여성들의 의식비교와 우리의 과제
- 도쿄, 서울, 평양 토론회를 중심으로, 김윤옥(토론회 실행위원,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 원장)
한국여성단체연합 조국통일위원회/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 공동주최, 『여성운동과 통일운동』제2차 세미나 주제 1 / 198
1. 들어가는 말
남한의 진보적 여성운동은 일반운동과 마찬가지로 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의 모순과 질곡들의 주요원인이 민쪽분단에 있음 .
& 인식하게 되었다 .강대국의 이념적 대결로 빚어진 한반도의 같은 민족끼리의 군사적 대결은 정제적으로는 국방비의 과잉지출
로 여성복지의 전무상태를 초래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팽배한 군사주의 문화로 성폭력과 힙의 논리가 난무하는 불평화가 여성
들의 ae 침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 .90년대에는 종석시카고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인식은 현심사회주의의 해체로 인한 국제사회의 급격한 질서개편
f 앞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은 우리로서는 당연한 열망이 되었다, 이러한 열망을 위해 활동하던 남한의 진보적 여성지도자들
은 일본의 양심적 여성들을 매개로 제1차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토론회를 성사시켰고 도쿄(1991531-6.2), 서울
BURGOS 들면) 있다
Saal 대한 남과 북의 여성 론회에서 일차적으로는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토론화에서의
주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gees) 통일운동에 대한 인식을 비교해 보고 결론으로 우리의 과제를 찾아보려고 한다,
2. “Sas 여성"에 대한 남북의 주장들
21. wee 주장
(자 그 복, 군죽운동, 교유(이효재},.군사주위몬~~
화에 aide oes) 창출, er 중의 Zio} 협력의 Baal 구축, 다저 dee .바로알기 운동(이우정} 동을 .제시했
으나, 제2차 서울 토론회에서는 "통일과 여성" 부분에서 이경숙 .교수가. 남한정부안인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주장했다. 그는
통일의 3대원칙을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으로 내걸며 “이질화"된 WSs 전제하고 “서로 다른 두 체제가 엄연히 존재합을 인
정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영역을 넓허가면서 하나로 되는 바탕을 점차 키워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 개방,
교류, YAS 통해 남북간에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부분에서 SEIS 찾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북측의 연방제안을 과
도기의 방안일 뿐 궁극적인 Belo]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어념과 체제가 다른 연방제안은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ay
- 13 - ~ caidas At G 200 히기
1
다고 주장했다. 이런 단합은 조국통일과 민접히 관련되는데 "자주적, 평화적으로 외세의 장애를 극복하는 일에 7천만 겨레가 Bs
합처야'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는 퉁일이란 wise] 자주권을 확립하는 일이며 민족내부에서는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고 화해하는
-일이라고 보고 그러므로 민: 민쪽대단결은 “조국통일의 근본전제이자 곧 그 본질적 내용을 이룬다"고 했다.
“ola 의미에서 남북합의서는 i 서로 싸우지 말고 화해하고 협력하기 위해 함께 서약한 민족대단결 선언"이라는 것이
다. 남북합의서의 화해조항은 그 자체기 도모하기 위한 내용이며 불가침 조항과 협력:교류조항도 민족내부에 존재하
는 남침과 북침에 대한 APIS 없애고 Pie WAS 이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가능성'이
지 '현실'은 아니다.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여성들은 과제를 가지는데 ?천만의 반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민족대단결에
앞장서서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부드럽고 다감하며 이해섬과 동정심이 많은 것으로 하여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을 바라지 않는"
EAS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여성들은 분단으로 인해 남자들보다 더 슬픈 Bes} 고동을 겪고 있기 때문에 민쪽의
화해와 단합을 누구보다도 절절히 바라며 실현을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사상과 이념은 선택할 수 있으나 민쪽은 선택할 수 없으며 우리 USFS 중시하고 WSS 첫자리에 놓았던 전통들을.
열거,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가 3차에 걸쳐 실현된 것도 여성들이 조국통일을 위해 단결하는 숭고한 역사이며 AL
상과 이넘을 조월하여 단결할 수 있다는 확중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여성들의 호소는 다른 사람들의 호소보다 더 힘이 있으니
자주 만나자고 제언, "우리 여성이 만나면 민족의 절반이 만나는 것으로 된다"고 했다. 자주 만나지 않으면 형제도 남이 되지 않
는가고 반문하며 온겨레의 마음 속에서 장벽이 허물어지게 하여 민족대달견을 이루게 하자는 것이다.
31 동일에 대한 남북여성의 인식의 차이 ㅣ}
3-1. 여성이 통일의 주체라는 인식의 근거문재
통일운동에 여성이 Fay}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남북이 똑같이 인식하고 있으나 그 근거로는 대체로 남측은 “Age 잉태하
고 가족생명도 보존하는 특성”(도쿄에서 이효재)이나 모성성(이우정)을 내세우고 있고 북측은 분단으로 제일 고동받고 BOS 강
요당했기 때문이라고(정명순, ee) 근거를 설명하고 있다.
남측이 내세우는 근거에 대해서는 정현백 교수가 지적한 바 있는데, 이런 주장은 기존의 성역할 고착에 기여하게 되고 또한 남
YS 지배, 착취의 정복의 심성을 지닌 SAS 규정하는 것을 통해 성차별을 반대하는 남성이나 민족민주운동에 참여하는 yas
과 불필요한 대립관계를 만들거나 광범위한 aE 형성에 제약으로 착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3-2. 여성현실에 대한 이해
남측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중측적 억압과 차별하에 있는 여성들의 HDS 설명하며 분단극복이 필요하다고 했고 가부장
문화나 군사주의 문화. 이원론적 가치관의 영향 하의 of VAIS 토론회 때마다 언급, 이에 따른 여성운동의 발전을 설명했다.
북측은 Ease] 평양까지 일관하여 여성들의 aye 현실을 내세웠다. 도쿄에서 이연화 대표는 "남조선여성들의 자주, 민주,
AQT 위한 SEE 외세로부터 여성의 Eo] 짓밝히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에 허덕이는 현실을 변혁하
고 여성의 참된 AGS 이루려는 두쟁"이라고 전제하면서 “공화국의 여성들은 공화국 정부의 올바른 정책으로 모든 사회적 불평
a0 해방되었고 여성운동이 새로운 높은 단계에서 전개될 수 있으며 여성의 운명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했다. "공화국 여
은 정치적으로도 동등한 ae jae 있고 경제적으로도 채용이나 ZN Bean 임산부나 모성차별은 eae 있고 AL
~ aaa a Wry 2) t,t,
ety
3-3, 통일방안의 문제
남측은 이경숙 교수가 발표한 한민족공동체방안, 하나의 제도적 통일방안을 제시한 것
선명하게 그러내지는 못했다.
BES 3회에 걸쳐 연방제안을 설득력 있게 일관하여 주장하면서 그것에 대한 남측의 합리적이고도 비판적인 SES 기다리는
AAR. Feo) 통일방안은 50넌대까지의 자주적 총선안, 60년대의 과도기적 연방제안, 70넌대의 고려연방에안, 80넌대의 고려민
주연방제안 soe 변화해 왔다, 연방제안이란 남한의 “두개의 한국" 정책에 대웅하여 "하나의 조선"을 내세우는 방안이며(군사 )
문제 해결을 통일정책의 주요전제로 삼고 있다, 때
1990년 5월 김일성 주석은 최고인민희의에서 재조정된 조국통일 5대 방침을 발표했는데 이제 북한은 자신의 체제유지를 보장받
는 가운데 BIE 이루어야 하는 was ae aaa 있다 Salat tel Sugae 군사문제해결과 양쪽의 Ale 인정
ach 그리나 "협상의 용이"라는 tie 있다고 oy 남축의 Be. 속히 도출하는 문제가 wee
이외에는 진보적 여성운동의 통일방안을
고 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정치적 체제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간과정에서는 이넘체제가
달라도 "같은 쪽으로 몰고가는 데에"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3차 평양에서 이효재 대표는 "민쪽대단결" 부분에서 통일의 3대 기본명제를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로 전제하며 지금까지는
주로 외세를 향한 자주에 민족대단결의 초점을 두어왔고 그것이 Fas} 그동안 간과된 부분, 즉 계급/계층/성으로 분열된 민족
Wes EEE 고려해야 a aa 민즉대만절이란 .- 소유와 권력의 oe 분배 가 건형되어야 하며 민족내의 seat
족은 인족"ㅎ로 a 이 진다고 Soa
한반도의 분단극복과 통일을 위하여 SEIS 이끌어 왔던 남측의 통일운동 인식은 다분히 남한 내의 사회적, 이념적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동안 남한의 통일정책은 일반적으로 각각 처한 입장과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게기된 것으로서 제5공화국의
'민쪽화합민주통일론',제6공화국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검대중의 '공화국연방제안'。 문익환의 '3단계 통일방안', 김낙중의
4단계 SUI 민쪽민주운동 세력의 '연방제 통일방안' 둥 다양한 제안들이 제창되어 왔다. 그러면서도 정부 내에서도 당장
으리 SNS ©
현재의 주어진 유리한 국내외의 조건을 이용하여 북한에 대한 개혁과 개방화 압력을 가속화하여 궁극적으 이루자는
주장과 현단계 남한의 경제력으로는 흡수통합이 불가능하므로 일정정도 북한의 경제력이 성장한 다음에 greys" 추진해야 하
며 이를 위해 남한이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갈둥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하면서도 아직 정책적 기조라기 보다는 그 하위단위에 불과한 방안들에 치중된 남한의 통일정책의 공존 가운데서
여성운동 자체의 통일방안은 전혀 형성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을 봄 「여성운동과 통일운동』 1차 세미나에서 정현백
교수가 지적했듯이 여성단체들은 정부의 안에 반대만 하지 "통일방안이나 통일정책과 관련하여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TAA
AAS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여기서 정현백 교수는 “oye so] 통일정책은 민주화, 사회체제의 변혁이 동반되어 어느
것이 선결조건이기 보다는 동시적인 해결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연방제안이 될 수 밖에 없지않겠는가"라고 제안한 바 있다.
2-2. 북측의 주장
북측은 도쿄토론회부터 평양까지 시종일관 분명하고 일관된 연방제안을 주장했다. 서울토론회의 “통일과 여성" 부분에서 남북
여성들이 각자 자기 정부의 대변인만 하는 것 같으니 다음에는 여성들 자신의 방안을 내놓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도 평양에서 다
시금 북측은 여전한 연방제안을 제시했다.
도쿄토론회에서 정명순, 려연구 대표는 미군주둔과 푸사훈렵을 문제삼으며 전쟁위험을 억지할 제도적 보장이 필요하다고 전제,
연방제 통일방안이야 말로 현실적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정명순은 여성들이 통일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모색하기 위한 싸움
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하며 1996넌을 통일달성의 해로 정했는데도 아직 민쪽간에 통일에 대한 합의가 없음을 개탄, 제도적 통
일과 연방제의 두 방안이 있으나 동일을 평화적으로 부담없이 성취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 두개의 정부, 두개의
제도인 연방제기 고 주잘했다. 제도적 SUS 흡수통일론인데 그것은 어느 하나의 ES 없애야 하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서울토론회에서도 정명순 대표는 우리 WSS "이질화되어 있지 않으며 다만 오해와 WAS 가지고 있을 뿐이며 46넌간 다른
제도하에 살아왔으나 민족적 공통성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형성되고 공고회딕었다" 고 했다. 그는 "동일문제 해결에서
는 어디까지나 민쪽을 우위에 두어야 하며 제도는 사회발전과 더불어 변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연방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연방
제는 "상대방의 SAS 침해하지 않으면서 통일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방제를 절
대화하고 고집하지는 않겠다. 통일에 유익하다면 누구의 제안이든 받아들이고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도 했다. 그는 그것을 위해
50명씩의 대표가 같이 앉는 「정치협상희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거기서 순수하고 소박한 협상, 누구를 고집시키거나 끌어당기는
식이 아닌 BAS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북여성들이 함께 조국통일방도를 모색하고 확정할 "민족통일정치협상회의" 소집을 위
해 노력하자고 주장도 했다, 그리고 남북여성들이 함께 "합리적인 통일방안을 공동으로 연구"할 "남북여성회의"”도 제안했다.
평양토론회의 “민족대단결" 부분에서 Bes 사회과학원장은 “민족이란 wes 언어, 영토와 문화, 심리적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궁고한 사회적 집단이며 수난과 곡절을 겪은 민족일 수록 민쪽의 단합을 특별히. Westy 적절히 호
소"해 왔다고 전제했다. 그러므로 분단된 우리민족이 대단결을 하느냐 여부에 민쪽의 존폐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유구한 세월
우리 민족은 한산의 세모시와 길주의 마포, 영변의 약사단과 전주의 창호지를 바꾸고 함경도 처녀와 서울 총각, 전라도 처녀와 평
안도 총각이 서로 시집장가를 오고가면서 의좋게 살아왔고 임진왜란 때는 부산의 동래산에서 봉화가 올려지면 연이어 무산과 웅
기에서 타올라 온 겨레가 해직치는 싸움에 떨쳐 나서곤 했다고 회상, 이러한 민족은 외세에게 국권이 강탈당한 친일세력이 생겨
민쪽단결에 Fel 가기 시작했다는 것어다. 더욱이 강대국 때문에 분단된 이후 47년간을 남남처럼 격폐되어 살아오는 사이에 우리
민족은 서로 오해, 불신, 적대시의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나라와 민족을 분열시켜 동치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상투수단".
이라고 경고하면서 미국이 남조선애 들어온 이후 시종일관 SIS 가로막아왔다고 주장했다. 특히 “aol GSS 건 일부 세력
이 미국의 이간정책에 편승하여 민족 내부에 대결을 고취해왔다"고 강조했다.
강원장은 민쪽대단결이란 "한 겨레로서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초월, 화해하고 단합하여 단일민족 본래의 BES 회복하는 것"
이라고 정의하면서 "“사상이나 이념보다 민쪽의 이익과 요구를 우선시하며 사상과 이념을 민족공동의 이익에 복종"시켜 나가야 한
0 thon ie | wpe 보우 이 승수
} 이 A 6 at a ot Fast
3-4, 민족이해의 =
남측은 47년간의 이질화된 민족을 전제로 내세우며 사회주의 교육과 자본주의 WHS 받아온 "이질화된 민쪽"이 서로 신뢰회복
하고 닮은 Ho] 되어가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다원사회와 공존공동체라는 말은 하면서도 언어의 이질화나 이넘의 차이가 있는
민쪽이해가 깔려있다. 이질화가 없어져야 민쪽성회복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한다.
북측은 “laste 없다"고 부인한다(정명순) 다만 오해와 편견이 있을 뿐이고 47년간의 제도적 차이는 있었으나 반만년의 유구
한 민족성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WHS 우위에 두고 사상이나 이넘이나 체제를 초월해야 통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특히 동
일의 기본원칙에서 민족대단결을 중요시하며 민족을 사회적 생명체, 체제는 선택할 수 있으나 민족은 선택할 수 없는 고귀한 것
으로 인식하고 있다.
a
3-5. 평화이해의 문제
남측은 평화의 반대를 폭력개넘으로 설명하는 . 핵이나 군축문제도 언급하나 전쟁위협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의 구조 문제를 평화의 문제로 설명하고 지다
북측은 평화의 문제를 “전쟁반대"라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도쿄부터 평양까지 시종일관 미군가지의 철수 핵무기 철수로 비핵화
하자는 것, 팀스피릿과 같은 외국군과의 위협적 군사연습 반대, 그리고 서울과 평양 두번에 걸쳐서 "군사경계선에서의 어느 병사
의 사교로도 일어날 수 있는 전정의 위협"을 장조하고 MAGS, 262) 조승조는 "여성들의 평화운동은 초점을 전정반대, 대
.결반대, 무장충들 반대하는 것 야 한다"고 하며 “조선반도는 현재 대비된 군대수가 무장력에 있어서 세계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거대한 무력대치로 대두"되었는데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은 일방의 정책적 의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병사의,
AFH 같은 우발적인 사교에 의해서도 임의의 시각에 전면전쟁이 터질 수 있는 사태가 항시적으로 조성될 + 있다“고 우려를 표
현하고 있다. 대체로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음 원하지 않고 있으며 군사적 대결상태가 첨예한 한반도에서 대규모 전쟁연습
이 중지되어야 평화가 유지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3-6. 구치
바로: 민주화, 군축운동, 국보법 폐지, 통일인사 석방운동, 교류, 상대방을 올바로 알기 Se 제시하고 있으며, 북측.
은 휴전조약을 평화조약으로 전환하는 제도적 평화구축, 군비의 단계적 축소, 한반도 비핵화, 군사훈련 중지운동, 교류와 연대 등
을 제시하고 있다.
4. 우리의 과제와 전망
이상과 같이 3회에 AA 토론회에서 주장된 내용과 인식의 차이를 간추려 보았다. 여기서 앞으로의 통일운동과 토론회를 위하
여 우리 남측여성운동의 합의가 어느정도는 도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누구나 생걸 것이다. 토론을 위하여 필자의 생각을 제시하
고 보중, 수정되었으면 한다.
4-1. 함의도출의 과제
진보적 여성운동의 합의로서 통일방안이나 이에 따른 정책적 기조를 수럽하고 이를 관철시킬 다양한 방안들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예로 연방제 방안을 기조로 한다고 하더라도 비판적 보완이 수반되어야 하며 여성의 삶을 위한 사회건설의 장치를 구체
적으로 제시하며 주장, 관철하는 통일운동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선언적 당위성이나 분단분석은 지양되어야 하며 우리의 합의된
통일방안에 따른 실천항목이 주장되어야 할 것이다.
4-2. 남측 국내토론회의 확산
합의된 여성들의 통일방안 Selo] 공청회, 토론회, 연구회 FS 통해 수정되고 보완되는 과정이 었어야 한다. 이것은
통일운동인식을 확산하며 통일에 모든 여성들이 참여하게 되는 참여민주주의 여성운동의 연대모델이 될 수 있다.
여성들의
43, 구채적 실천
1) 앞으로의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활용
- 남북여성의 합의된 통일방안을 위한 도출
- 서로를 서로의 배경에서 이해하기 위한 신뢰구축을 위한 프로그램
- 종군위안부 문제와 같이 남북여성이 공동으로 연대할 수 있는 사안의 발국과 연대
운동
- 다양한 계충의 민주적 참여가 가능하도록 운동
2) 양측 정부의 “합의서와 부속합의서의 구체적 실천에 위배되는 사안에 대한 문제제
--- page 5 ---
기를 시효있게 대웅하며 운동으로 전개
3) 반전반핵, 평화군축운동의 지속적 전개
4) 북한사회 바로알기 위한 교육프로그램 운영
5) 기타
한반도 통일과 여성
정현백 | 평화를만드는 여성회 공동대표,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1. 6.15 남북 공동선언의 의미
6월13-15일의 남북정상회담은 & 국민을 Seow 몰아넣은 만큼이나 역사적 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지니는. 의의는 첫째로 한반
도 문제의 해결구도가 '북-미 축'에서 '남-북 죽'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남북관계는 주로 미국의 대북 정책에 따라 결정되었
다. 또한 북한 역시 미국과의 외교적 해결을 우선시하였다. 북의 대미외교와 관련된 사안을 상당 부분 한국정부에 일임하려는 미국의
태도와 김대중 정부의 일관된 대북 포용정책 그리고 상대적으로 Belo 안정기에 접어든 김정일 체제의 개방의욕 Gol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었다. 따라서 Cable 과거의 남북관계 변화는 대부분 남북 최고위급 지도자의 결단이나 정략적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진.
반면, 이번의 정상회담은 오히려 구조적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fag) 정상회담은 그간의 적대적 공생관계에 머물러 있던 남북관계가
이제 상호협력적 공생관계로 바뀌어가고 있고, 이번 정상회담은 의례적인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서 실질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상황적 조건이 창출되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남북정상회담의 [후속작업은 어떻게 진행되어야할 것인가? 우선 중요한 Ae 후속회담이 화해,
협력, 평화, 통알이 점차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전쟁 방지와 평화구
축, 군비축소, 서해교전과 같은 충돌의 방지책과 같은 군사적 문제가 경제교류에 못지 않게 회담의 중심의제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서는 현재의 GAUSS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작업이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회담초무부터 군축과 같은 정치적 사안을 전면에 내세움
으로써 후속회담을 결렬시키지 않도록 하는 신중함도 필요하다. 동시에 우리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한다는 '자주'의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되, 당장은 한반도를 둘러싼 네 강대국간의 외교관계를 슬기롭게 SoS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또한 인도주의 문제의 분리원칙이 견지되어야 하고, 그 일환으로 이산가족문제와 '북한동포 돕기'는 조건 없이 처리되어야 한다. 비
슷한 멕락에서 모성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는 북한 여성들이나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손상을 겪고 있는 어린이들에 대한 지원도 시
급히 진행되어야 한다. 또한 '상호주의 원칙'은 남/북간의 신뢰감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비대청적이
고 Baga Bide 남촉의 유연한 HP ATA 반드시 AME OBE AMS, Gd 되들려 받아야 한다는 Ah Mel,
장기적인 국면에서의 '상호주의'가 주장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향후의 남북관계에서는 ede 둘러싼 발상의 전
환이 필요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동일이슈에 평화주의적 시각을 결합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 남한 사회 내의 풀뿌리 민
주주의 확산, 남남대화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군사주의 문화 제거가 Mole 진정한 내적 통합을 실현되지 않기 Welt, 통일 독일
에서도 드러나듯이, BHT She] 없는 통일은 항상 내부식민지를 만들어내고, 진정한 내적 통합은 불가능해진다.
2. 왜 여성에게 통일이 중요한가?
앞에서 제기한 6.15 남북 공동선언의 역사적 의미를 soma, 여러 복잡한 상념들이 떠오른다. 이 정상회담은 과연 여성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리고 여성들은 이를 위해서 FAS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상기한 일련의 논의들이 왜 여성에게 중요한가'
a 대한 물음이다. 1999년 남한의 국방비는 1년 +e 22% a) 비해, 복지 예산은 1996년의 경우 4.038에 불과하였다, 남북간의 평화
MAS 확립하여 국방비를 줄인다먼, 이 엄청난 SL AVS 위한 복지비로 전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조원이 넘는 Es
- 17 -
이나 북한 물자지원을 할.경우 보조금([email protected].을 지급해주는 방식 Se 제안하고자 한다 ㆍ
여성들은 정상회담이후 진행될[후속과정훼서 여성의제가 제기되고, 여성에 대한 베려와 우대조치를 남북 쌍방 간에 합의할 수 있도록
Bas 가레야 한다 (또합 향후 남북교류는, 특히 경계지원음 통혜서 가속화될 전망인바, 우리 여성들은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의 차관
에 대한 남한정부의 보중이나 SO 투자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등에서 여성경제인이 우선적인 AE 받음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져야
하고, 이를 위하여 여성운동은 적극적으로 gale 제기하고, 그 실현을 위해 싸워야 한다
2) 여성운동의 과제와 역할
이미 앞에서 밝힌 대로 통일정책이나 통일운동에서 실종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는 BESS REA 대한 적극적인
aso] Baar. 그러나 통일에 관심을 가진 여성들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여성운동은 APS
일운동의 대중화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여성통일운동을 대중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여성운동단체들이 €aaoz 할 수 있는 사업은 '북한여성 돕기'이다. 이 사업은 무
엇보다도 당장 굴주리고 있는 우리 자매들을 구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의무이자, 남한 여성들 사이에서 남북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여갈
수 있는 중요지점이다. 진보적인 여성운동은 그간 여성권익 향상을 위한 투쟁을 알차게 전개시켜왔지만, 경제력이 취약한 만큼 모금활
동에는 많은 성과를 "보이지 3 FAA 자연히 경제력이 있는 남성들을 : a= 북한동포돕기가 추진되었고, 종교단체에서는 여성들이
모금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이것이 여성의 이름으 1정기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어서, 여성의 노력은 가시화되지 못하였다. 여
성단체의 이름으로 지정기탁이 이루어지지 못한 만큼, 북한 내 여성단체들의 발언권이 Saya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단체연합은 1991
년이래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4차에 결친 남/북/일본여성들의 공동토론회를 개최한 역사적 성과를 지니고 있다.
특히 평양에서 열렸던 3차 Sede 분단이후 판문점 경계선을 넘은 최초의 만간교류였다. 이런 역사적 age 계숭하기 위해서라도
여성들은 북한여성 돕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자매애를 다시 과시하고, 이런 Ase 토대로 oad 이후 람
어진 abst '아시하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토론회를 속개하고, 이블 통해 북한여성과의 만남을
<경화를 만드는 여성희>나 <한국어성단체연합>을.중심으로 한 진보적 여성운동이 수행해야할또 Be 시급한 과제는 Songs) 확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에 지출하고 있지만, 우리와 미국사이에는 불평둥한 행정협정으로 인해 미군범죄가 자행되고 있고, 여기에 「
여 우리는 재판권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군에 의한 기지촌 여성살해나 See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
고, 우리는 이 여성들의 인권침해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세우고 있지 못하다. 춘천, 동두천, 평택, 군산 등의 미군기지에서는 독-
물 불법 매립, 각종 오ㆍ패수의 무단방출 So] 자행되고 있고, 매향리 주민처럼 미군사격장의 소음과 오폭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
있다. 어디 그뿐인가?
분단된 남한 사회에서는 정치, 문화, 사회 둥의 각 방면에서. 군사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분단은 전투에서 폭력직이도록 훈련된 |
성을 SAT FAIS AIAN 남성성으로 구성해 가부장적인 남성성을 강화시킨다. “남자는 그저 군대 갔다와야지 사람 구실을
es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군대는 남성을 어른으로 키우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한국의 보통 남성들은 군대에서 남성
월의식, 힙의 논리와 권위주의에 적응과 HSS 배우고 가쪽부양자로서 책임을 지닌 강한 남자가 되는 것을 집단적으로 재교육받게
다 또한 고된 훈련과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성을 도구화한다. 결과적으로 많은 남성들이 군대에서 처음으로 매매춘을 경험하고, 「
대한 줘의식을 갖지 못하게 되고, 성에 대한 상품화를 비롯한 다양한 가부장적 ESS 익히게 된다. 일상생활의 폭력성과 그로 「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일상화, 공무원시험에 적용되는 군 가산점과 여성이 겪는 피해 그리고 일상화된 ope. 이런 것들 모두가 :
및 그가 낳은 군사주의 문화와 MES 수 없는 연관을 지니는 것이며, 이는 여성들의 일상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바로 이런 여성이
한 열악한 현실들이 통일을 필요로 하는 이유들이다.
또한 지금도 남한에는 분단과 가족의 이별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정부는 남한 거주 이산가족을 767만 명
이중 이산 1세대가 123만 명, 고령 이산가족 수를 약 69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분단은 남북한 통틀어 1천여 만 명의
산가족을 낳은 셈이다. 그러나 50여 년 이 지난 지금도 휴전협정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고, 이는 한반도가 준 전시상태임을 확<
켜주고 있다. 바로 이산가족의 엄청난 숫자 속에 가쪽과 생이별한 어머니와 누이의 한이 서려 있지 않은가?
우리 여성들이 통일문제에 VIS 가지게 된 =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는 독일 통일이었다. 독일의 통일과정은 ages 놀라거
였고, 그리고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여성이 동일과정에 참여하지 못함으로 인해 여성들은 통일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통일
과거 동독여성의 5096가 실업자가 되었다, 여기에는 탁아소비용이 너무나 뛰어 올라, 많은 여성들이 월급을 상희하는 닥아비 때문에
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크게 작용하였다. 근간에 독일의 자살자중 80%가 동독출신이며, 이들 중 90%가 여성이라는 Ab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런 현실들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 여성들이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독일 통일의 경우, 가장 상처를 입은 집단은 동독출신의 여성이었다. 통일이후 옛 동독인들은 VS 국민'으로 전락하였는데, ol
부 식민지의 중충구조에서 가장 하단을 차지한 것은 여성이었다. 많은 동독여성들이 해고의 일차적인 대상이 되었고, 또 많은 a
은 별안간 자본주의 경영으로 바뀌면서 급등한 탁아소 비용를 감당할 수 없어서, 직장을 떠났다. 이런 끔찍한 현실은 우리 여성운'
게도 통일에 대한 충분한 대비의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통일이 여성의 so] 끼칠 영향은 매우 크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군축이 진행되면, 축소된 국방비는 사회복지비로 전용될 수도 「
것이다 Fe 당장 경게교류가 활성화될 경우 여성들은 북한의 남성노동력과 BIS 해야할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고, 이런 상황 :
서 여성은 일자리에서 축출될 염려도 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들을 막기 휘해서라도 여성은 통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3 여성의 임박한 실천과제
통일 후 성평둥이 실현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미 통일과정에서 여성주의적 관접이 함께 침유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
이 지금부터라도 통일정책의 입안과 집행과정에 능동적ㆍ주도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1) 정부에 대한 여성들의 요구와 그 실현을 위한 투쟁
ABSA 통일정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통일 관련 제반 분야에 여성참여가 늘어나야 한다 \우선/여성들은 정부의 통일관련 위$
정책자문희의, 정상회담 이후의 실무회담, <남북 기본합의서>의 부문별 부속합의서 이행 및 정부당국간 wes 위한 공식기구인 분
공동위원회 등에 여성의 참여율을 높여주기를 요구해야 한다. %올러)통일부 내에 여성관련 부서를 신설하여 통일이나 남북교류외
계된 여성 UPS 보다 전문적으로, 보다 효율적으로 집행하기를 희망한다. 마한가지로 wee 여성교류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완을 요구해야 한다. 북한 동포돕기 운동이 활성화된 이후, 민간교류는 zal 남성교류나 돈가진 Arie 교류로 흐르는 경향이 (
다. 남성과 같은 경제력을 지니지 못한 여성들의 경우, 남북교류의 기회가 제한되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남북여성교류에서 여성에
한 우대조치를 요구해야 하고, 남북교류협력기금을 교류가 활성화되지 않는 분아에 투입하는 방식을 통해 여성들이 북한과의 Bal
사이다, 남북정 alge) FAspH 이루어지다 보니, 국민들은 과거의 반공교육과 대비하여 2AM Eee 겪고 있다. 어느 평범한
어머니가 묻는 ARNE 김정일을 괴수라고 우리 아이에게 설명하였는데, 다시 물으면 이제 무어라고 대답하지요?'에 만족할 만한 대
담을 ABATE 일이 통일교육의 일차적인 과재가 되어야겠지만. 더 나아가서 ALES 여성의 랭ㆍ불행이 어떻게 분단극복문제와
직결되어 있는지, 그래서 여성들이 통일과정과 동일운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대를 확대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6[와 더불었7여성운동은 deel 주로 정치적인 차원에서 풀어가고자 하는 동일의 과제를 평화주의적 관접에서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평화실현과 zc . 이접이 바로 남성과는 다른 여성동일운동의 강접이라 생각한다. 진보
적 여성운동의 퉁일과정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통일 후 미래사회가 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지닌 사회가 되는 dol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다
여성과 통일
-2000년 전여대협 통일교양자료집 wel
Legon 인한 여성현실
1999년은 남북 분단 80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여성의 AMPS 아마도 '일본군종군위안부'의 경우인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 식민지
지배때부터가 가장 oe 이성희 고통을 형상화하고 있다. 독립지사의 가족들의 고통, SES MOVIN 만주벌판으로 피난갔던 농민
wise.
이었다.
- 18 -
이러한 식민지에서 벗어났던 제2차대전종결은 민족적으로도 진정한 해방이 아니였지만 여성들에게도 해방을 가져오지 않았다. 한반! ㆍ
분단은 Lane 일본식민지에서 해방된 직후 강대국간의 군사적 펀의주의에 Jal ae Rt ial 시작되었고 분던이데율로:
age = Saale alee 의해 사회속에 내제화회어 Faas 갖는 이데올로기 ar 기능을 하게 되었다
특히 박정권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분단 이데올로기를 사회통합의 기조로 활용함으로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군사주의-
를 형성하는 EGS ANth 군사화된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차별과 ale 당할 수 밖에 없다
러한 AUS 일제시대의 경험과는 차이는 있으나 여전히 보편적 여성억압의 기제는 군사주의문화로서 사회에 전반적으로 잔있다.
그 이후 국민들에게 통일에의 회망을 갖게 했던 7ㆍ4 남북공동선언은 남북 양국 정치집단의 내부통치 강화용임이 증명되면서 민간!
의 통일운동은 비공개 지하운동의 형태로 지속될 수바에 없게 된다.
1980년 5월 민주항쟁이 군부에 의해 폭력적으로 제압되고 이에 대한 미국의 암묵적 지원이 밝혀지면서 5월 민주항쟁 이후 평화통<
동은 반미 자주화운동의 AAS 보다 강하게 띄게 된다. 80년대를 통한 민주화 FPS 마침내 집권세력으로부터 lowed 7ㆍ?선언을
끌어 낸다.
7ㆍ7 선언은 반북 적대관계로 일관해오던 정권당국으로 하여금 남북교류와 교역을 통한 민족공동체적 남북관계로의 전환을 Aspe
만든 의미를 지닌다.
이후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은 폭발적으로 고양되고 국가보안법 폐지, 군축문제, 미군철수운동, 반핵평화운동으로 영역도 확대되고 남-
간단체의 인적교류도 이루어 지게 되었다.
1991년도 9월 남북은 UNA 동시 가입하고 AE 1월 비핵화 공동선언,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각 부문의 부분적 남북교류 실현. :
형태의 남북 교역 그리고 북미관계 개선 등 여러 가지 통일 환경 변화가 일어났다.
1992년 2월 남북정권 당국간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게 된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ㅁ
를 통해 북한의 경수로 건설과 대체에너지 지원사업에 한국이 참여하고 있는 상태이고 북한은 한반도 평화정착방안을 논의하기 :
남북, 미국, 중국의 4자회담을 받아들이는 상태로 변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GS 계속되고 있고 분단으로 인한 여성들의 퍼해 또한 지속되고 있다.
(1) 분단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들
1) 이넘의 희생자들
분단사회의 퍼해자로 신음하며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 중에서 우리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대림의 회생자가 된 남편과 자녀들 및 그 :
인 여성들의 문제를 간과할 수가 없다. 해방 직후부터 과열된 좌ㆍ우익의 사상적 대림과 정치적 투쟁, 그와 연결된 노동운동이나 :
운동에 참여했다가 좌익으로 낙인찍힌 사람들, 6ㆍ25 SAS 통해 보복적인 대립이 격화된 상황에서 회생당하며 사상적 입장을 강.
해 자진 월북한 남편이나 OSS 둔 여성들의 DEL, 단순히 월남이나 피난하는 과정에서 가족과 혜어지게 된 이산가족의 경우와는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이산가족의 경우는 그들의 이산 원인이 사상적 문제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WES 공개
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삼는 우리의 현 체제 속에서 남편과 자녀 및 본인들이 aelap
로 낙인찍였다거나 그 입장에서 활동한 좌익사범으로 정죄당한 경우는 그들의 VES 공개하여 호소할 수 없는 지경에 있다. 이:
사상의 자유를 제한 당하고 특수한 이데올로기를 강요받는 우리 모두가 당하는 피해인 것이다.
2) 전쟁의 피해 _
1980년 6월 25일에서 1963년 7월 2/일까지 계속된 동쪽상잔의 APS 막대한 병력 손실 이외에 일반 사람들에게 Helge 상처와 <
을 남겼다. 남한의 경우만도 사상 24만 5천, 실종 30만, 부상 23만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히 학살당한 자의 수를 13만으로, 그리고 '
당한 수를 8만 5천으로 잡고 있다. 이밖에도 30만에 가까운 전쟁미망언, 38만의 전쟁부상자, 10만의 wel} 발생하였다. 그리고 의용;
강게징집된 남한 젊은이들의 수만도 약 20만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직접 간접으로 Was 당하며 남북으로
동해감으로써 수많은 이산가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전쟁경험과 전쟁피해는 전쟁을 BU 세대에게 서로에 대한 불신과 SOS 남김으로써 통일에 대한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3) 이산가족
'이산가쪽"이란 부모, 자녀, 형제, 자매 및 손자 Se] 직계 가족관계와 숙질간 및 4촌 이내의 방계 근천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외세어
--- page 6 ---
한 민족주권의 강탈, 분단 및 전쟁 동의 민쪽수난의 과정에서 이산되고 분단된 경우를 지칭하는 것이다. 가족이 자의에 의하여 헤어지
거나 흔히 불의의 ADE 인해 분열되는 소위 '결손가쪽'의 경우가 있으나, '이산가족'의 경우는 어떤 개별 가족의 문제이기 보다는 민족
국가적 입장에서 당한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로서 결과된 것이다. 이 시대의 이산가쪽이 발생한 원인은 일본 강점시대로까지 소금할 수
도 있겠지만 2차대전 이후 국토가 분단되고 민쪽의 분열이 고정화됨으로써 가족관계를 도저히 희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으므로 분
단이 보다 직접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남한에서의 이산가족을 1000만 인구로 추산하고 있다. 이렇게 추산하는 객관적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대한 적십자사에서
는 가족이 모두 남하한 경우보다는 남자들만 왔거나 가족의 일부만이 월남해 은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Hel
가족의 일부를 남기고 온 이산가쪽이다. 따라서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이들 이산가족들의 혈육을 모두 합치게 되면 그 수는 1.000만 가
량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1.000만 이산가쪽'이라 부르는 수치의 근거를 해방 후 6ㆍ25 전까지 월남한 피난민 330
만 명, 6ㆍ25 후 1ㆍ4후퇴 때 피난해 온 100만 명, 6ㆍ25 당시 피납된 인사 8만4천명, 6ㆍ25중에 발생한 행방불명자 30만3천명, 반공 포
로 2만/천명, 사할린 동포 4만 명, 재일 북송동포 10만 명, 1953~83년 사이 어선납치 둥으로 인한 납치인사 3600여 명 중 아직도 억류
된 440여 명으로 제시하면서 이들을 합치면 근 500만 명이고 따라서 혜어진 사람과 찾는 사람들 동시에 생각할 때 이산의 아픔을 당하
는 가족은 1.000만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에서 발표된 바에 의하면, 북한 주민의 3분의 2가 월남한 사람들과 가족 및 근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
남한 인구 4480만명(96년)과 북한인구 3300만명(94년)을 합쳐 6.790만명으로 볼 때, 약 7분의 1에 해당하는 국민이 분단으로 인한 이별
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2) 불평둥한 여성의 aaa 분단구조
현재 총인구 44851천명 중 여성 인구는 22275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49.77%를 차지하며, 남성 100명당 HIS 98.7명이다. 평균수명은
여성은 768세 남성은 728년으로 나타나고 있고, 모성사망율(출생 10만 명당 임산부 사망자수)은 30명 수준에 달해 선진국에 비해 상당
히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출산과 관련하여 보면 출산률의 전반적인 저하와 출생성비에서의 남자의 증가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출생성비는 1994년 현재 1154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는 한국의 강한 가부장제 문화가 잔존해 있음을 드러내주는 자료이다.
여성의 경제활동 BH 483%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40.1%를 차지하고 있다. 직종별로 여성은 사무직, 판매직, 서비스직 등에 집중
되어 있고, 전문기술직. 행정관리직 so] 비율은 대단하 낮은 편이다. 사업체 규모별로는 4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에 전체 여성취업자의
62.7%가 종사하고 있으며, 저임금 AS 많이 몰려 있어 여성노동자의 평균임금은 남성 노동자의 609%] 불과하다.
정치, 정책결정직에의 여성의 참여 현황을 보면 국회의원 WY 중 여성의원은 9명으로 전체 의석 중 3%에 불과하며 9/년 1월 UNAS
에 의하면 국회의원 중 여성비율은 세계 139위이다. 지방의회 의원 156%, 광역의회 의원 5.76%, 여성장관은 23명 중 1명에 불과하고
정부 내 각 위원회의 여성참여율은 7.2%에 지나지 않는다.
통계청은 이러한 한국 여성의 상황을 근거로 세계 116개국과 비교한 한국여성의 권한척도가 세계 78위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한 바 있
다
문제는 이렇게 낮은 한국여성의 정치ㆍ경제적 지위는 분단현심과 무관하지 않다는.것이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당하고 있는 불평등은
남녀를 분할지배하여 최고의 이윤을 획득하고자 하는 자본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고 있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적절히 Beet
결과이다. 그러나 분단 현실은 여성들의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이념적으로 재한하는 기능을 해 왔고, 우리 사회
AAS 권위주의적 가부장제로 구조화하는데 기여해 왔다.
예컨데 70넌대말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SEL 불온한 운동으로 낙인찍히고 경찰의 직접적 탄압의 대상이 되어 왔다.
현재까지도 노동자의 권익운동은 좌익적 운동으로 규정 지워질 위험성을 안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전체를 지배하는 남성중심의 권위주
의 문화는 군사문화와 상통하는 것이며,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정치진출은 실질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분단현실은 여성의 낮은 정치적ㆍ경제적 지위형성에 원인이 되어온 것이다.
2) 낮은 복지 수준과 높은 국방비
남한의 Shots 14조3천5백억 원이고 이는 전체 예산의 21.29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사회보장 예산은 6.2%에 불과한데, 이는 세계
교역 AS 자랑하는 남한으로서는 어디에 내놓기 부끄러운 수치이다. 남한의 경우 과도한 방위비 지출로 인하여 사회복지분야에 대한
HAS] 막심하다. 예를들면 외국의 사회복지예산의 비중이 방글라데시가 123%, Slo] 47%, 스위스가 63%를 차지하고 있어 남한의 사
- 21.
2항은 연방제와 연합제의 TEAS 중심으로 SUS 지향시켜 나갈 것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SU 상을 밝힌 항으로써 장차 우리가 살하같 퉁일조국의 토대가 될 것이다. 우리가 만들 통일 AVS 남녀 차별이 없고 모
FA BSR 여성해방 인간해방이 된 세상이어야 한다. 따라서 여성민중들은 장차 통일조국의 AS 구체화 시켜 나가는 al 여성의 입장
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4항은 경제 사회 문화 AS 보건 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DHS 활성화 할 것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도에 대한 것으로써 직접 만남으로써 민족대단결 의식이 높아 질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남북의 여성들은 여성 정책과 여성의 AS 찾아 나가는 부분에 대해 함께 논의하면서 모두가 PSs 통일
조국을 준비하고 또 앞당기는 방향으로 교류협력을 해야 할 것이다,
속초 세 할머니가 겪은 6 ㆍ25 전쟁
김귀옥/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 사회학, [민쪽21]2001년 9월호 실린 원본
1996년 9월부터 199/년 2월, 약 0개월간 박사학위 준비를 위해 속초 YES, 월남 실향민들의 마을에 머물면서 그들과 맺은 인연으로
인해 학위논문이 나온 후에도 SAS 찾는 일이 종종 생겼다. 최근 속초에 가니 뜻밖의 us]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가음동화." 어
느 텔레비전 방송사의 드라마가 속초 청호동을 배경으로 촬영된 이래로 현재 속초와 동해안에는 가을동화 열풍이 불고 있다,
1990년대 속초가 어업도시에서 관광도시로 번화해지는 바람에 과거 농존이나 어존으로서의 ARE as 사라져가고 있다. 속초 시내
에서 만나는 사람의 223는 월남인과 그 후예들이고 나머지는 강원도 일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돌이다. “속초 이북사투리 경연대
회"나 “(한국전쟁 당시)헤어진 가족을 찾아드립니다"라는 속초시나 속초경찰서의 공고만이 '속초'의 정체성을 묻게 할 뿐, 속초 토박이의
모습은 어디에서 찾음 수 있음까?
전쟁 발발 후 3년간 미군정 겪은 속초
1996년, SAY 조사하러 가기 전에는 그곳에 얼마나 많은 민쪽의 애환과 BS] 서려 있는지 미처 께닫지 못했다. 더욱이 그곳이 현
대사에서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해방되고 Wa 이북에 속했던 속초는 한국전쟁 나던 초기만 해도
강원도 양양군에 PHA 중간 규모의 농촌지역이었다. 일제 말기에 읍으로 격상되었다가 해방되어 유동인구 때문인지 다시 면으로 격하
되었다. 그런 Ko] 1961년 BA 유엔군 점령지역이 되고 1934년 UA '대한민국'으로 행정권이 이양된 후 1963년 강원도내에서 4번째로
'시(006)'가 되었다. 이런 사실들의 배경을 하나하나 접해나가는 사이에 뜻밖에, 그러나 조금만 역사적ㆍ사회학적 상상력을 펼친다면 너무
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들과 접하게 되었다.
속초와 양양군을 포함한 강원도 Mit, 경기도 WTS WES 때 미국은 쾌재를 올렸다. 점령하자마자 미국은 양양군 일대에 '군정'
을 선포하여 3년간 미군정을 실시하였다(졸저 “잃어버린 또 하나의 역사" 「『경제와사회』2000년 여름호 참조바람). 그 Fe 미국이 2차
세계 대전 이래로 사회주의와의 Aaa} WAS 벌이면서 처음으로 점령한 사회주의 영토였다. 미국은 정보요원들이나 학자들을 그곳에
보내 “실험장"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사회주의 관할 지역민들에게 어떻게 자유의 맛을 보게 할까?" 그런 기획하에 그
RS 3년간 대한민국 행정권이 미치지 않는 특수지역으로 묶어났다. 다만 미군의 관할 하에 대한민국 육군 1군단이 그곳을 대리통치하
게 되었다.
속초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이형근공화국'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1군단과 그 군단 사령관인 이형근장군의 권세가
그만큼 the 말이다. 미군과 국군, 치안대, 반공청년단 Fol 의해 크고 작은 초법적 행위가 저질러졌다. '큰 모스크바'였던 양양군 조산
리와 '작은 모스크바'라고 불렸던 속초 부월리의 사회주의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ABE 없이 총살이나 수장을 당하는 일이 많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월북행을 했다고 한다.
5년 전 조사 당시에는 그런 소문만 들었을 뿐 진상에 접할 여유가 없었다. 과연 그때 무슨 일이 어떻게, 왜, 일어났을까? 의문만 부
풀려진 채, 언젠가 조사할 기회를 만들리라고 다지며 속초를 떠나왔다. 2000년 6ㆍ15 남북공동선언에 의해 3차례의 남북이산가쪽의 역
사적인 상봉이 있었다. 속초의 어느 월북자 유가족 집에 전화를 결어, MVS Bee 신청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마라"라며
회복지 수준이 매우 RSS 알 수 있다. 남한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복지 지원이 거의 없기 매문에 개별가정에서 스스로 해결해야 <
단적으로 복지수준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AS 모성보호 비용의 사회부담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둥이 ahr
갖추어져 있지 못한데서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국방비는 주한미군 주둔비와 전력중강비, 군운영유지비 FOB 사용되고 있는데 주:
군 주둔비용 총액의 78%(2조4560억원)를 우리가 낸 세금으로 부담하고 있고 전력증강을 이유로 대미 무기 구입이 세계에서 1위를 >
하는 등 탈냉전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9) 개와 PM ANS
한국사회 구석구석까지 밀집해 있는 향락업소는 대략 40만 개를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0만 개의 향락토폐업소에 종사하는 ㆍ
‘EARL’ 혹은 겸업 매춘여성은 약 120~1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숫자는 한국의 젊은 여성인구 620만 명(15~29세)의 oF 1,
해당된다.
한국사회 윤락산업의 확산 이유는 자본주의 한국사회의 구조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해방 이후부터 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1
지 증가 원인을 분석해 본 결과 A 번째 적어도 해방 이후 한국에서 윤락부분이 크게 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군대, 그리고 외국;
주둔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윤락여성들이 밀접되어 있는 지역을 보면 군대 밀집 지역하고 AA 있다. 군대가 이렇게 많을 -
에 없고 군대 옆에 으레 매춘이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분단구조 자체가 가장 큰 원인이다.
두 번째는 정치적ㆍ경제적 이유이다. 70~80년대 독재 정권이 35 정책이라는 우민화 정책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Rrhe 것은 누구니
는 사실이다. 보는 스포츠, 그리고 66는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된 정책이었다. ASS 통폐합하면서 신문사에 주간지를 하나씩 발간:
것을 허락해 주는 방식을 택하면서 성상품화는 정부에 의해 조장된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본의 투자 또한 성상품화 중대에 결정적
향을 미쳤다. 제조업 투자보다는 이윤이 많이 나는 3차산업 부분에 특히 자본이 집중되었다. 정부는 정치자금과 우중화의 목적 때
퇴폐향락업 중가를 용인했다. 이러한 구조적인 접근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 다음 구조적인 원인과 더불어 하나 지적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식과 실행의 문제이다. 여성이라는 것을 성적 대-
로 생각하고 그리고 남성다움의 과시를 정복한 여성의 수로 7Heshe 의식과 관행이 문제이다. 한국은 이상적인 남성상이 제대로 :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폭력적이고 성적이고 그런 것을 남성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을 이상적인 남성으로 ae
는 가부장적인 의식, 이것이 결국은 성을 폭력으로 지배하게 되는 성폭력, 그리고 여성을 대상물로 생각하면서 맘대로 부리는 상품:
성을 확대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사회의 성폭력 발생율은 세계 2위이다. 한국사희 성폭력의 특성을 보면, 성폭력 피해자의 66%는 여성이며 가해자는 거의 '
이다. 피해자의 3086가 13세 미만의 어린이이며 19세 미만의 미성년자가 509를 차지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보면 아는 AK
NS 차지한다. 또한 가해자의 연령은 10대에서 70대까지이며 학력, 계충과 무관하다. 또 가해자 중 정신병자나 범범자는 매우
숫자이며 정상적, 일반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거의 죄의식 없이 저지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 성폭력 범죄는 일반 여성들의 스트,
1위 요인이 되고 있다.
성폭력을 발생, 유지시키는 가장 주된 BUS 한국사회의 이중적 성규범과 전반적 폭력문화의 지배에 있다. 한국 폭력문화를 자본:
문화와 군사문화의 결합으로 볼 때, 성상품화와 성폭력의 대상으로 여성들이 다른 어떤 사회보다 희생당하는 것은 분단 구조에 기「
다고 본다.
6.15선언과 여성해방의 관계
<여성에게 615공동선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 이향에서 여성은 어떤 역합을 할 것인가? >
1항은 민족 자주, 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주한미군 범죄를 통해서 민쪽이 자주권을 잃으면 엄청난 DFS 받는 다는 것을, 특히 여성의 경우
욱 그러하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고,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잇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전 민족이 대!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 여성들은 반미 투쟁과 반일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여야 할 것이고 민쪽대단결의 선봉에 서야 한다. 전민쪽 대단결을 !
서는 남북해외 여성민중이 더욱 적극적으로 연대연합 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이남 내 여성의 연대연합이 더욱 중요할 것ㅇ
이남 내에서 여성민중들과 수많은 여성단체돌이 6.15 공동선언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연대연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말문을 막았다.
을 초에는 속초의 한 지역신문에 "이제는 속초인이 말할 때어디"라는 제하로 몇 회 연재하기도 했다. 단 한 사람이 그 신문사에 `
걸어 “그때 어떤 집의 남편이 처형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하며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황급히 ASS 끊었다. 속초인들은 <
도 아무 말이 없다. 마치 어떤 기억도 없다는 듯, 그런 AAS 겪지도 않았다는 듯. 결국 그 조사는 나의 문이라고 여겼다. 2001년
보름간의 일정으로 조사길에 올랐다.
속초로 가기 전 서울에서 미리 속초의 아는 사람들에게 속초 토박이들로서 지난 시기 속초 역사에 대해 중언해 줄 수 있는 ap
소개해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분단 1세대들의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고 많은 피학살자나 월북자 유가쪽들은 속초를 떠났다고 했다. :
도 속초에는 몇 안되는 해당자들이 있다고 지인들은 얘기했다. 정작 속초에 와 연락이 된 당사자들은 이유를 말하지도 않은 a, 인|
에 응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보내왔다. 그럭저럭 조사가 시작된 지 심 일쯤 지났을 때,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50대 후반의 남자분이
사의 취지를 이해한다며 자신의 숙모와 고모를 소개해주겠다는 연락을 주었다.
인민군 가장한 국군, '홈치기 부대"
속초 조양동의 '논산' 마을. 청초호변의 조양동 대단위 아파트인 부영아파트의 바로 뒷 마을어지만 그곳은 아직 농존동으로 남이
다. 7월 중순 한 낮, 매미울음아 길게 Sea 좁다란 농촌길을 들어서자 오래된 시골집 한 채가 나타났다. 마당에 놓인 평상 위:
비녀 2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있었다. 'ㄴ'써 할머니와 'ㅇ'씨 할머니. 사촌 동서지간인 그들은 남루한 웃차림이지만, FHSS A Ui
AZ 여성의 순박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드리자 나를 소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그 남자분이 "숙모넘들,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 잘 드려 주세요"라고
을 하고는 느린 Ale 떠났다.
어색한 시간을 줄이고자 준비해간 WAS 잠시 나누어 먹으며 분단과 전쟁의 시절로 함께 시간여행을 떠났다. (인터뷰에 참여한 |
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음을 양해바란다.)
“우리 영감은 인민군대에 나갔다가 이승만 특명으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어."
운을 A 것은 'ㄴ'씨 Boy Sa, 양양군 출신)이다. 남편 'ㄱ'씨의 일가 WAS 속초 논산리에서 'ㅅ'씨네 일가와 함께 유지로 Fs
'그씨네 일가 어른 중에는 일정때 양양군수도 있다고 한다. 'ㄴ'씨 할머니의 남편은 160d BH 하순 한참 더울 때 논산의 4. 5명의 :
들과 함께 동네 주민들의 ASS 받으며 인민군에 입대했다. 그후 몇 년간 남편 소식이 끊겨 죽은 줄로 알았다. 정전되고 Be
늦은 가을에 SHS ub} 야윈 채 돌아왔다. 그는 몇 일 밤낮을 자고 난 후에야 살아나온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원산에서 유엔;
만나 포로로 잡혀 거제수용소에서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겼다. 속초가 유엔관할지로 되었다는 A 듣자 반공포로가 되어 1933년 이ㆍ
의 '6ㆍ18특명'으로 무사히 귀향할 수 있었다고 했다.
‘Va 할머니도 남편에게 지난 AS 말했다. 입을 떼기도 전에 악몽 같던 몇 do] 떠올라 SDSS 적셨다. 1930년 12월경인가, :
구이 1차 SRS 점령했다가 후퇴할 무렵. '인민군북'을 입은 군인 십 여명이 인민군 선발대라며 마을로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자 -
지내던 몇 몇 남자들이 인공기를 꺼내들고 앞장서 맞이했다. 군인들이 환영대회를 열어달라고 하여 집집마다 젊은 남녀들이 환영치
왔다. 논산리 바로 옆, 부월리(현 조양동과 청호동 인근) 솔밭에서 환영대회를 연다기에 두 할머니도 동원되어 나갔다. 가는 길에 ;
들의 행색을 보니 M7] 불안했다. 입은 옷은 인민군복이었지만, Bl 몰라도 그들은 인민군대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여자들은 ㅎ
둘씩 BAS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Ao} 난 'ㄴ'씨 할머니도 소여물을 주어야 한다고 YAS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환영대회가 열린 지 얼마 안되어 총성이 한 AS 천지를 혼들었다. 그리고 S 세상이 고요해졌다. 환영대회에 나간 사람들의 다:
총살당했고 논산 사람도 7, 8명 포함되었다. 흰 눈 덮인 솔밭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도망쳐 나온 아랫집 여자가 말했다. 그들은 인민군을 가장한 국방군, 일명 '홀치기부대'였다. 당시 그들은 북에서부터 남으로 후퇴:
길에 민가에 들어가 그런 Ale 민간인들을 학살시켜 악명을 떨쳤다. 유가족들은 무서워 시체를 거둘 엄두도 못냈다. 그 이듬해 -
되어 유가쪽들은 몰래 숲으로 가 시체를 수습하여 인근 야산에 묻었다. 그 후 부월리 Swe 옛 사람들에게 '해골마을'로 통했다.
군정 시절 속초에는 공포와 BS] 시간이 흘렀다. 1군단 사령부가 부월리에 세워지자 1군단 사령관 이형근 장군을 비롯한 군!
장교들은 부월리 FUSS 내쫓고 그들의 집을 차지하고 살았다. 심지어 논산리까지 들어와 남의 집 안방을 내놓으라고 했다. 주민!
쓴 소리 한마디 못하고 군단이 죽으라면 죽는 시능까지 내야 했다.
"흰 페'들 눈치보며 침묵으로 살았던 시절
--- page 7 ---
‘RA 집에 해방 직전에 시집온 AA 'ㅇ'씨 할머니(79세, 양양군 출신)는 군정이 되어 월남했던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7|w2Ieh,
안방까지 내주고 나니 화가 났다. tsto] 알을 나으면 장교의 젊은 hfe] 차지했다. 부역이나 행사 SAS 왜 그리도 많던지. 길 ge
다, 군수물자를 수송한다며 수시로 젊은 사람들을 동원했다, 인공 시절(8이북 북한 관할시기)에도 여맹 회비를 내야 했지만 군정 시절
부녀회원비는 배로 뛰었다. 아이들 학비도 처음에는 싸다고 좋아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인공 시절보다 비싸졌다. 모든 게 그랬다.
'ㅇ'씨 할머니의 남편 n'a] Ake 모두 빨갱이인데 남편만 월남해서, 'ㅇ'씨 할머니는 빨갱이들의 FHS 받아 SS Bar, WHS
일제때 일본인 소유의 통조림공장에서 사무를 봤는데 해방되고 공산주의가 Ari] 월남해 버린 것이었다. 시누이 WHS 일정매 순사였
는데 해방되고 인민위원회 청년들에게 민쪽반역자로 찍혀 월남하고 말았다. 전쟁 나고 시누이 WHS 속초로 돌아와 치안대에서 활동하
며 속초, 양양 인근의 빨갱이나 그 유가족들을 잡아 처단하거나 설악산이나 오대산 등 양양 인근의 SHS 잡는 일에 나섰다.
양양군과 DALI 함께 속초에도 월북자들이 적지 않았다, 속초에서 두 번째로 부자 마을이었던 논산에는 특출나게 공부한 사람이
나 사회주의자는 없었지만 그래도 똑똑한 사람은 많았다. 그런데 전쟁통에 똑똑한 사람은 죽거나 (이북으로) 들어가 버렸다. 인민위원장
이나 여맹위원장네는 가족 전체가 들어가고 학살당한 세포위원장과 농민위원장의 남은 가쪽들도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인공 시절이건
군정 시절이건 마을 사람들끼리 보복하며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일시적 후퇴시기(1950. 10~12월초), 월남했던 반공청년단들과 같은 '흰
So] 노동당원이던 OHS 잡아 죽도록 PES 했다. 그때도 'ㅇ'씨 할머니의 시아버지가 구명을 하여 살려주었다. 그 후 OMe 인민
군과 함께 월북했다.
설령 월북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던 가족들은 군정과 흰 패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제대로 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애시당초 마을과
인연을 끊고 동네를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남아 있던 사람들의 자손 중 잘 된 사람은 별로 없고 지금도 그들은 숭죽이며 살고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이야, 누가 왔어"
‘Va 할머니 집으로 두 할머니와는 분위기가 또 다른 할머니가 찾아왔다. 'ㄴ'세의 과부 시누이 'ㄱ"씨 할머니(2세)였다. 그의 얼굴에
서는 세파를 이겨낸 사람에게서 풍기는 AAD 거칠지만 당당한 풍모가 배어 나왔다.
‘UR 할머니가 나를 소개하며 평상에 올라앉으라고 권했다. 그는 “A, 이런 지난 간 결 애기해"라며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졌다. 'ㄴ'
씨 할머니가 “우리 시누는 남편이 들어가서, 참 고생이 많았어"라고 WES 티어주었다. “언니도 별 말을."
그는 얼마간 두 할머니와 내가 얘기 나누는 것을 듣고 앉아 있었다,
“우리 동네나 인근 마을에는 영감들이 많이 들어가서, 말짱 과부들지. 말짱 과부. 과부들이 모여 않으면 구들(한방)에 가득해. 노인정
에 가봐. 남편 있는 여자가 몇 집밖에 안돼."
“내 애기 들어볼라우. 나는 Batol 남편과 생이별을 했어"
인민위원회 간부 등 속초 앞바다에 수장시켜
어느 듯 그도 우리의 이야기 Soe 들어왔다. 속초 논산리 'ㄱ'씨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ㄱ씨 할머니는 해방된 이듬해 19살에 속
초 시내에 사는 이씨(80세)에게 시집을 갔다. 논산 유지였던 'ㄱ'씨 할머니의 아버지가 이써를 고른 것은 이씨네 집안이 속초 시내 양반
이고 유지였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소학교를 마치고 왜정 때는 어업조합에서 US 했다. 시야버지가 해방되어 인민위원화에서 as 하
게 되자 남편도 함께 일했던 잘생긴 청년이었다. 결혼 후 몇 년간 꿈결처럼 행복하게 살았다. 전쟁 나기 전에 하들을 낳자,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전쟁이 나면서 남편 이씨는 군대 지원 물자를 만들라, 선전 격문을 쓰라, 눈코 뜰 새가 없어 바빠 집에 들어오기도 힘들어졌다. 인민
군의 일시적 후퇴시기에 HHS '이내 돌아 올께'라는 말만 남기고 면사무소의 서류나 SAS 챙긴 봇짐을 지고 동료들과 떠났다 한 겨
울 FAAP, 시야버지는 장질부사에 걸려 아프지, 간난애는 떼를 쓰지, 언제 반공청년단이 들이닥칠지 몰라 무섭기 그지 없는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청넌단이 gol 찾아와 남편을 내놓으라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생사람 WS HED 그들은 다른 YOR 갔다. 그날 밤, 메마른 sso] 총성 몇 발이 울렸다. 부들부들 떨며 밤을 보냈다. 다음 날 바
람이 B44 부는 이른 아침, 옆집 여자들 몇 명이 왔다,
“00엄마, 소식 들었어? 간밤에 농민위원장이 총에 맞아 죽고, 조선소장이었던 박씨, 인민위원에서 일하던 고씨, 이씨, 김씨 모두 6명이
(속초)앞바다에 수장되었다네.”
그는 남편 ASS 떠올렸다. 남편이 후퇴할 때는 원망스러웠지만, 죽을 자리를 피한 게 천행이라 여겼다. 아이 야버지가 살아 있기만
을 빌고 또 빌었다.
종각이었던 고씨는 Kas] 수장을 면하고 Bolted, 반공청년단에게 다시 걸려 기어코 군인 손에 총살당하고 말았다. 청년단들 중
- 25 -
1. 90년대 이전의 여성 노동자 운동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물론 일제 삭민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해방과 분단이라는 사회 상황 속에
서 다른 사회 운동과 마찬가지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의 BSS 갖추지는 못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이 일본 남성 노
동자의 UTS] 4분의 1에 불과했고, 대부분 세 미만의 여성 노동자들이 최악의 노동 환경에서 과로와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등
의 조건 아래에서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자연발생적인 노동 쟁의가 1920년을 전후해서 빈번하게 일어났고0 3ㆍ1
운동 이후에는 보다 조직적인 모습을 나타내가도 하였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전개되기 시작한 이후 여성 노동자들의 SES 크게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민주적인 노동 조합을 중심으로 주로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면서, 극히 부분적으로 여성들의 특수한 요구를 제기하고 관철시켰던
1970년대는 여성 노동자 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마련된 시기이다. 1980년대는 1970년 여성 노동자 운동 경험의 축적과 반성 위에
서 독자적인 조직과 이념을 세워 나가고 여성으로서 겪는 특수한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대 중반을 넘어서면셔 여성 노동자 SSS 전체 사회 운동의 HS 조직적 체계가 정립되는 것과 함께 비로소 노동운동, 여성
운동 내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범주로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후 여성 노동자 운동은 생산직 여성들뿐만 아니라 사무직, 판매
서비스직, 전문 기술직 여성들에게까지 점차 확산되어 나가고 있다.
—
=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운동
190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은 수출 주도형 산업화 속에서 신흥 업종 섬유, 봉제, 가발산업 성장하여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의
존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에 여성노동자가 WAS 진출하게 되어 농촌에서 도시로 이농한 생산직 연소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주
도되었다. 여성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44280) 차별 임금을 받았으며, 노동 현장의 비인격적이고 폭력적
인 통제하에서 욕설, 구타, 성폭행을 당하는 것은 물론, 여성들에 대한 기본적인 모성 보호의 se 받지 못한 채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이중의 억압 아래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받았다.
이와 같이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던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은 다른 어느 집단보다도 먼저 절실하게 그들의 ate] 조건을 개선하
려는 운동을 자연 발생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70년대의 유신독재 체제 아래에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노동자 운동
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여성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노동 조건 개선 운동에서부터 민주노조를 결성하기 위한 운동에 이르
기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또한 정부의 적극적인 탄압과 개입으로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남성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적 전투적이기는 했으나 일회적으로 끝나버렸던 것에 비해 여성노동자들은 수년동안 민주노조를 사수하면서 지치지
6) 사례1 목숨 건 아사 투쟁 경성고무공장 여성노동자 - 여성들만의 최초의 파업 ; 1923년 임금인상의 요구를 담아
1454 소녀부터 4.50세 중년의 여성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는 아사동맹을 조직하여 파업투
YS 감행한다. 이 투쟁은 광범위한 사회여론을 불러 일으켜, 전국가지에서 일제의 SIS 폭로, 규탄하는 유인물
이 나오고, 연설희가 조직되는 등 지원투쟁 또한 활발하였다. 그리하여 10여일이 지난후 요구조건이 완전 관철되
었고 파업은 SIZ 끝났다. 이 파업투쟁은 일제하 여성들만의 최초의 파업으로 노동자와 일반시민에까지 큰 영
향력을 미친 싸움이었다.
사례3 HAY DESY 을밀대 강주룡 ; 강주룡은 간도에서 독립군으로 Rese FAS 돕다가 남편이 전사하자 부
모와 어린동생들의 생계를 도맡아왔다. 그녀는 1930년 5월 29일 쟁의에 들어간 평원고무공장 파업의 지도자로서
단식동맹을 조직하고 공장을 점거농성하다가 밤 1시 경찰에 의해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그길로 40여척이나 되
는 Sad 다락 위로 올라가 노동자들의 단결과 노동조건의 참상, 고용주의 횡포와 착취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
다. 7시간 40분 동안 버티다가 경찰에 끌려 내려져 평양서에 구속되자 이번에는 단식으로 대항하였다. 76시간 만
에 석방된 그는 해고된 여성노동자들의 신입여성노동자 습격에 가담하여 해고, 1주일 구류를 살았다. 석방후에도
비합법노조운동으로 격렬한 투쟁을 벌인 평양노조 사건에 가담, 1931년 5월 28일 Beda 검거, ads 옥중에서
살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당시 평양노조운동은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전라도 등 전국에서 활발하게 벌어진 직업
별 노조를 산업별노조로 개편하자는 운동이었다.
에는 815가 나고 남으로 나갔다가 10d 10월 국방군과 함께 SAE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군인들의 Ye 믿고 빨갱이{
나 가족들을 처단하며 SOM. 그 유가족들은 중공군과 함께 내려왔던 인민군들이 다사 후퇴할 때 모두 (북으로)들어가고 말았디
인민군이 다시 내려오고 들어갔으나 남편은 다서 오지도 가지도 않았다. 장질부사에 걸려 시름하던 시아버지가 이듬해 초봄에 3
의지가지 없던 'ㄱ'씨 할머니는 간난애를 데리고 23살, 시집 간지 4년만에 논산 친정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우리 영감을… 싫어, 싫어“
군정 시절 얼마 동안은 밤마다 공포의 공기가 무겁게 내리눌렀다. 남편과 생이별한 설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
만이 소리를 내는 한 밤에 국군들이 젊은 여성들을 겁탈하고 돌아다넌다는 소문이 이웃 마을에서부터 돌았다. 그들은 낮이면 공비 -
Fag, AY) 하면서 동네를 이 잡듯 살살하 뒤지며 Sole. 논산 마을은 말할 것도 없고 군부대 인근 마을의 처녀들뿐만 of
과부들도 군인들에게 겁탈 당했다, 특히 과부집은 남편이 도망간 빨갱이 가족이니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는 Bale 무사출입했다.
어느 날 밤, 'ㄱ7'씨 할머니 집 마당에도 낮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옆에 뉘였던 간난애를 끌어안았다. 그
마침 안방 So] 켜지더니, 아버지의 혔기침소리와 함께 “게, Yo] 들어왔느냐"는 호통소리가 들렸다. 그러기를 몇 날밤. 아버지의 호-
리에 군인들은 더 이상 T's] 할머니 집에 WAS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번 당한 처녀들이 많았고, 어떤 AYE 3번 이상 겁탈을
하고는 결국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얼굴 고운 Sele 당하는 A 무서워 거지처럼, '미친년'처럼 꾸미기도 했다. 동네 어른들은 군<
이 동네 처녀 AS 말린다고 수근거렸다.
그후 a 할머니는 동네 일이나 세상 일에는 절대로 나서지 않았다. 허다하게 있던 부녀회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Rgojel 1
데리고 Bat SS 갈고 바닷물을 길어 HPS 만들고 채소 농사를 지어 장에 내다 팔고 큰아버지가 키우던 소 13마리를 맡아 기:
도 했다. 그래서 목돈만 생기면 무조건 BS Ate.
“할머니, 소원 있어요?"
“우리 손주들 글 많이 가르쳐 높은 사람이 되는 거밖에 없어”
이쯤 되자 다른 할머니들이 끼어 들었다.
“허허, 진짜 소원 말해봐. (영감)데리고 살았으면 좋겠지?"
“허허허, 나는 영감은 싫어. 스물 세 살에 영감하고 헤어져서 남편 AS 몰라서, 싫어”
작년에는 VS 상봉이 많았고 할머니는 건강하시니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갑자기 BS seh «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지고 화를 내는 듯 싶더니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 “우리 BAS. 싫어, 싫어." 낮은 목소리로 도리개질을 (
‘Va 할머니는 Oda 악몽을 되풀이하는 듯 했다,
‘TA 할머니가 진짜 싫어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남편과의 짧은 행복 어후에 긴 절망을 BT 오십 년이 넘도록 아들 키우고 가:
일으키는데 청춘도 FE 받쳤다, 월북자 유가쪽이라는 '딱지'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좌절하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다시는 :
하지 않도록.
할머니들은 헤어지가 전에 내게 구전되어온 시와 노래를 들려주었다.
“붉었구나, 붉었구나, 오천 앵두가 붉었구나. 머언 앵두 다 따먹고, 앵두씨만 남았구나. 어~라~만수"
그날 밤 꿈속에서라도 「ㄱ'씨 할머니가 할하버지를 만나 행복하기를 빌었다.
<순서>
한국여성노동운동사
비정규직여성노동자의 현실과 과제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화로 인한 문제점
IMPAGS} 여성 노동
두쟁사례
한국여성노동운동사
-관악 인문대 우완의 글
- 26 -
않고 AAAI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Hed 이후로는 거의 여성들의 투쟁만이 노동운동의 명맥을 이루기도 하였다.
1970년대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의 운동을 운동의 목표와 과제를 중심으로 구분해 보면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노조가 없거나, 노조가 있어도 어용인 A 단위 사업장에서 노동 조건 개선과 생존권 확보
를 위해 싸워 나간 경우들이다. 둘째, 대부분 남성 간부들로 구성된 기존의 어용 노조를 민주 노조로 바꾸거나, 노조가 없는 사
업장에 민주 노조를 결성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이 앞장서 싸웠던 경우를 들 수 있다. 정부와 회사
Fal 의해 똥물 AMS 받으면서까지 싸웠던 동일 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FAM), 전태일 열사의 분신 자살로 시작된
청계천 피복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1070-1981)과 회사측의 무책임한 폐업 조치로 YA} 막연해진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
사에서 농성하면서 노동 문제가 단순히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차-경제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사회 전체에 제기했던
YHTSY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107871979)7!둥이 그 대표적 예이다. 셋째, 일반적인 노동 문제의 해결 과정 속에서 여성 노동자
의 특수 문제에 SS 뜨게 되어 그 권리를 획득해 갔던 경우이다. 노동 SES 법으로 제한하고 있었던 외자 기업에서 노조를
결성하여 ALMA 퇴직제의 폐지, 유급 산전 산후 휴가, 생산직 여성 사원의 승진 승급 등 여성의 평생 노동권 확보라는 새로
운 운동의 차원을 보여준 콘트롤 데이터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1976 1977), 기혼 여성 노동자들의 모성 보호를 위해 수유 시간
을 유급으로 따내어 기혼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노동 조합 투쟁에 동참시킨 삼성 제약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Sol 이에 해당된
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 과제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은 부족했다.
2) 198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
(1) 1980년대 전반 여성 노동자 운동
1970년대 말 20년간 지속되어 은 유신 군부 독재가 물러난 뒤 80년 봄에는 일시적인 정치적 이완기를 맞아
민주화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고양되면서 노동 SSE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517 이후 출범한 제 STIS BUS 노동 운동에
대해 한층 폭력적이고 탄압적인 정책을 펼쳐 노동 조합의 강제적 해산과 노조 간부들의 축출, 구속 등의 사태를 불러 왔다. 정
부는 기업주들과 결탁하여 노동 조합들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지켜 냈던 민주노조들(청계 피복 노조, 원풍 노조 등)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1983년 이후 점차 사회 민주화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노동 SSE BS 떠기 시작하여, 대한 마이크로 전자. 가리봉
전자, 대우 어패럴, Ba, 유니전 등에서 힘겹게 새로이 노조를 결성하게 되었다. 또한 1985년 6월애는 대우 어패럴 노조 간부 3
명을 구속하자, 구로 지역의 노동조합돌이 노조 탄압에 맞서 개별 사업자을 뛰어 넘는 연대 투쟁을 펼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
ASE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ASS 결국 천여 명의 해고와 40여 명의 구속으로 끝났지만,
1900년대 기업별 노조의 DY 분산성과 개별성의 WAS 극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80넌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전체적으로 노동 운동이 크게 고양되고 노동 운동의 발전과 올바른 방향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지
는 가운데, 노동 운동 내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특수한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리
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 운동의 맥을 이어가면서 치열하게 싸웠으면서도, 여성으로서 겪는 특수한 문제
7) YHE 가발을 생산하는 희사였는테 가발이 사양산업화되자 사장의 외화도피 Soe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9
노조가 생기고 임금인상을 요구하자 79년 문을 닫겠다며 폐업을 통고해 왔다. 여성노동자들은 폐업철회를 25
며 투쟁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청와대, 재무부, 은행, 정당 등 모든 곳에 호소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we
여 마지막으로 요구조건을 판철시키기 위해 신민당사를 찾아갔다. 여성노동자들은 신민당사에서 정부당국은 4
SAVE 즉각 소환할 것, 여성노동자의 생계대책을 마련할 것, 조홍은행은 \브무역을 은행관리업체로 인수할
을 요구하며 9일 밤을 철야 농성 하였다. 경찰의 강제해산 소식이 전해지자 여성노동자들은 투신조와 활복3
나누어 결사투쟁을 전개하였다. 수백명의 기동경찰관이 들이닥쳐 4인 1조로 10여분 Bol 전원을 연행, 3명을
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21세의 미혼여성노동자인 김경숙 열사가 사망하게 된다. 이 AVS 60년대 이후 누적도
은 사회경제적 모순이 첨예한 PHS FSM 사건으로서 각계에서는 이 AAS 규탄하는 기도희와 시위투%
광범위하게 일어났고, 부마항쟁에 이어 유신독재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또한 김경숙 열사의 추모 집희는 ㅇ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창립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 page 8 ---
nm
들을 노동 운동의 실천 과제로 제기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1970년대 노동 운동을 중심적으로 이끌어 왔던 여성 노동자들의 4
당수가 결혼과 함께 노동 LSS 떠나 가정에 안주하게 되어, 운동의 경험이 80넌대로 연결되지 못 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
고, 그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안고 있는 특수한 문제들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이해되기보다는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노동 운동 UA 여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노동 운동의 분열을 가져오며, 노동 문제가 해결되면 여성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통하여 여성으로서의 자각이 이루어지는 모습 또한 찾아 볼 수 있었다. 노
동조합운동 속에서 여성의 특수한 문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서 단결하고 그 요구를 하나씩 실현시켜 나갔다.
또한 노동운동을 하다가 해고되었거나 결혼으로 인해 잠시 현장을 떠나왔던 여성활동가들을 주축으로 하여 여성노동자운동을
수행하는 단채가 각 지역에 조직되었다. 특히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는 70년대 민주노조사수 투쟁의 중심이었던 선배노동자들
이 설립한 단체로써 설림당시에는 현장투쟁 지원과 교육, AAS SIA 활동내용으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8/년 이후 여성노
동운동은 여성노동자들의 현장투쟁과 전문여성도동단체들의 활동, 또한 여연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지원과 연대활동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2 1987년 이후 여성 노동자 Sse] 특징
1987년 이후 전개되는 여성 노동자 운동의 가장 FRA SAS 운동의 주체가 확대되어 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혔다는 점이
다. 직종별로 볼 때에는 1970년의 생산직 여성 중심의 운동에서 8/년 이후에는 사무직, 판매ㆍ서비스직, 전문 기술직 여성들까지
도 노동 조합을 결성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사무직 여성 노동자 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로 87d 9월 한국 여성 민우
회가 창립되어 사무직 노조의 여성부와 긴밀한 연계 하에 그들의 활동을 적극 추동해 내기도 하였다. 한편 1970년대에는 나이
어린 미혼 여성 노동자들이 운동의 SS 이루었지만 80년대 들어서는 기혼 여성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부인들까지도
여성 노동자 운동에서 중요한 KS 담당하게 되었다. (이리 Salo} He, 한국 피코, 나우 정밀 등)
8/년 이후 여성 노동자 운동은 크게 DAYS, 고용안정, 모성보호라는 세 가지 큰 이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첫 번째로 1987. 12. 4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자 그동안 현장 내에서 지켜지지 않았던 법적 권리에 대한 구제가 가능하게 되
었다. 특히 8/년 이후 사무직을 중심으로 노조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고용평등에 대한 투쟁이 활성화되었다.
한편 고용 안정을 위한 투쟁도 계속되었는데,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및 민주노조 사수 투쟁 과정에서 자본측은 휴폐업, 공장
이전, 핵심간부 해고, 집단해고 SLE 대웅하였고,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장기간에 결친 투쟁 및 처지가 같은 노조들 간에 공동
FAS 전개하였다. 1989년 이후 집단해고, 폐업은 여성노동자 투쟁을 무력화시키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한 방법으로 확산되
기 시작했다. 여성노동자는 휴폐업 및 대량감원은 노조 탄압의 수단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산업구조 조정과정에서 나타나는 구
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소위 부산 사람 다섯 명 중 한 명은 신밭업에서 일한다던 부산의 신발업은 1988년을 정
점으로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려 노조가 없는 상태이거나 어용노조 하에서 휴폐업과 공장이전, 영세화에 따른 대량 감원, 실업을
겪었다. 90넌부터 여성노동자회는 이러한 여성노동자의 고용불안정 문제를 단순히 노조 탄압 대응이라는 방어적 차원을 넘어서
서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고용안정 대책 마련을 위한 정책대응 활동에 들어갔다.
8/년 이후 여성들의 특수한 문제를 적극적인 투쟁 과게로 제시하기 시작하면서 모성보호도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여성노동
자의 열악한 작업환경 조사하여 화학물질이 여성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조사와 정책 요구 활동 전개하고, 노동조합 단
체협약에 모성보호 조항 따내는 활동 및 생리휴가 폐지 반대운동을 벌여 내었다. 여성노동자가 가정과 직장을 GA 수 있는
제도 마련 촉구활동을 전개하여 탁아법 마련을 위한 정책요구 활동과 어린이집 운영, 직장보육시설 설치를 요구하고 노동조합
단체협약에 직장보육시설 설치 조항을 확보하여 이를 쟁취해 내기 위한 투쟁도 시작하였다
이렇듯 MAS 경과하면서 여성 노동자 SHS 여성들의 특수 문제를 다양한 노동 문제와의 연관 속에서 동시적으로 해결하
려는 움직임을 보여, 임금ㆍ노동 조건 개선 문제 이외에도 고용 문제, 모성 보호 동의 문제를 적극 제기하는 성과를 남겼다.
2. 9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과 여성 독자 노조의 건설
- 29 -
되찾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2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민우회는 8/년 PH 이후 여성노동센터, 고용평둥추진본부 SS 운영하며 사무직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여성노동
자운동을 해왔다.
O sre we 사무직 여성 노동자 운동의 구죽기
노조 여성부 지원활동 강화 사무직 여성노동자의 차별철폐운동지원, 영세 미조직 사업장 여성노동자의 회원조직
(@ 90년"90년 전문성 강화 및 여성 특수과제 실천기
성차별적인 제도와 관행의 철폐를 위한 대웅 전략 및 실천지침 제공, 차별임금 소송을 통한 사회 AES, 차별적인 인사제도와
차별 문제에 대한 여론화 및 대웅방침 수립
@ BIW 사무직 여성노동자운동의 대중화와 정책 연구 역량 강화기
조사연구기능 및 정책 역량 강화, 노조 여성조직 활성화를 위한 교육, 성희롱 및 모집 채용시 용모제한 고발 se 통한 사회여
론화, 파견법제정 반대운동 등 여성노동정책과 BAR 개선운동 집중
OGAWA 풀뿌리 여성노동자운동의 전개
고용평등 추진본부 발족, 여성노동정책 모니터링 및 여성우선해고 반대운동, 신규실업 대책 활동, 지하철 성추행 방지 방송, 통
신상의 성폭력 근절을 위한 성차별적 의식, 관행, 문화 개혁을 위한 활동
여성독자노동조합의 건설 ~ 건설 배경과 활동들
지금까지 살펴본 여성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여성노동자, 그리고 한국여성노동운동이 매우 척박한 기반 아래 놓여
USS 알 수 있다. 특히 소위 IMF 경제 위기 이후 소수의 전문직 여성노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은 미조직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성차별적인 여성 실업이 금증하고, 여성실업자의 비경제 활동 인구화, 실망 실업자의 중대가 빠르게 al
행되고 있지만 양적인 고용통계는 여성의 실업을 비가시적으로 만들었으며 따라서 실업대책도 남성에 기반해 입안되었다. 또한
고용량뿐만 아니라 여성 고용의 AS 더욱 악화되었다. 여성 불안정 취업충이 중가하고 이들은 고용 안정성을 부여받지 못한 al
임금과 노동조건 모두에서 불리한 APS 받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여성들은 노동조합이 없는 4인 이하 영세사업장에서 노동하
고 잇거나 노조 가입이 제한되어 있는 비정규직으로 이들은 조직적인 방어막이 부재한 상태에 처해 있으며, 노동조합이 있는 경
우도 성차별과 위계구조는 노동조함에 의해 지속되고 강화되고 있어 여성노동자들은 조직적인 Uso] 부재한 열악한 상황에 처
해 있었다10
=
=
90년대 여성 노동자 SSS 양대 노총을 기반으로 한 운동이 전개됨과 동시에 여성 노조원이 금격히 감소되고 비정규직화된
것에 대항하여 여성독자노동조합을 건설한 것을 특징으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조직적인 침체 요인으로는 성차별적인 사회 구
조와 제도뿐만 아니라 노사 관계, 대기업 중심의 자본 축적 구조,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노동 시장 유연화 전략 형식적 민
주주의, 기업별 노조의 조직적인 한계와 남성 중심적 노조의 조직 운영방식, 여성노동자들의 의식과 활동의 문제 등 다양한 것
을 꼽는다. 9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에 대해서는 80년대 말 건설된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와 한국여성민우회의 PES 중심으
로 살펴보고, 여성독자노조의 건설에 대해 서술하기로 한다.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87년 3월 한국여성노동자회(이하 여노회)의 PHS 필두로 현재 8개 지역지부(서울, 인천, 부산, 광주, 마산, 창원, 전북, 부천,
안산)를 두고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이하 한여노협)를 건설하고 있다, 한여노협 10년사에서는 10년의 활동을 크게 다섯 갈래
로 정리하고 있는데, 민주노조 투쟁의 물결과 함께 한 활동, 여성노동자 권익확보를 위한 활동, 탁아활동의 모범을 세우기 위한
활동, 새롭게 개척한 지역부인활동, 국제연대활동 둥이 그것이다. 이 글애서는 시기별로 어떻게 활동해왔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보
도록 하겠다.
창립 당시 여노회는 대중적인 여성 노동자 투쟁과 결합하여 민주 노조를 굳건히 세우기 위한 노동조합 지원사엄에 중점을 두
고 교육선전, 개별사업에 대한 투쟁 지원을 집중적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전노협의 발전에 따라 노조 지원의 역할
에서 대중조직으로서의 조직위상을 새로이 설정하고 독자적인 여성노동운동 BALA 여성 문제 해결을 위한 사엄이 더욱 강조
되기 시작하였다. 산업 구조조정으로 인한 감원, 해고, 폐업이 잇따르자 고용안정을 위한 사업이 여노회의 중심사업이 되고, 이
전 사업장 단위의 투쟁 지원에서 고용안정을 위한 BIS 요구하고, Beye] 따른 성차별 해소 방안, 탁아 정책 요구 등 법적,
제도적 정책마련 및 획득이라는 차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각 지역 여성노동자회가 조직되기 시작하면서 지역적, 전국적 발
전이 끼해지고, 여성운동단체연합을 통한 여성운동 연대가 강조되었다.
문민정부가 수럽된 이후, 민중 운동 진영이 재편되고 있었다, 여성노동자의 조직률이 급감하고, 일부 지역에서 여노회가 해산
또는 휴업을 하였다. 여노회는 다시 한 번 대중조직으로서의 조직위상을 정립하면서 미ㆍ기혼 여성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부인의 조직화 WIS 수립하기도 한다. 또한 여성노동자는 생애주기가 ES] 여성노동자, 결혼과 임신 후 퇴직하여 전업주보
나 가내노동자, 다시 기혼의 여성노동자로 위치를 바꾸게 되므로 생산현장과 AGS 결합한 조직이 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
어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의 결합이 현실적인 과제로 떠올라, 이를 위하여 지역 단위의 조직사업이 확대되고 여노회의 지역적 확
대와 전국적 발전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여 Od 한여노협이 결성되었다.
Gd 이후 한여노협은 여성노동자운동의 대중화와 전문성 확보를 위해 중앙단위의 정책대응력을 강회하였다. 재정 중 정부 프
EAE 차지하는 비중이 금중하고, 고용안정 확보투쟁(비정규직 문제, 파견범 제정반대 투쟁), 평둥법 개정, 영유아보육법 개정
등 여성노동자 권리에 대한 법적, 정책적 공방이 진행되면서 여성노동자를 위한 정책연구 및 대정부 ASS 활발하게 펼쳐낸 것
이 그 예이다. 경제 위기 이후에는 실업국면에 대한 dss 통해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od 6월에 여성실업 대책본부가 발족
하였고 여성실업 정책 요구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취업과 미취업의 사이를 넘나드는 여성들과의 대중 접촉면을 확대하고 지
원하기 위한 사업들이 확장되었다. 한편 그동안의 고용안정을 위한 투쟁의 성과로 고용보험법 등 고용4범이 제정되었으나 임시
직, 계약직, 용역직의 확대로 여성노동자의 고용불안이 극심해지고 파견법 제정 반대 투쟁이 중심적인 이슈가 되었다. 또한 근로
여성복지기본계획안이 발표되고 남녀고용평둥법 개정, 영유야보육법 개정 둥 여성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법적, 정책적 공방이 진
행되면서 여성노동자를 위한 정책연구 및 대정부 aso] 활발히 진행되었다.
99년부터는 비정규직의 기본권, 여성 노동자의 인권과 평등권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선전과 정책대응력을 강화하고, 여성 고용
불안 문제 중에서도 비정규직 차별 철폐, 노동 기본권 확보 Se] 이슈를 게기하고 법제도 개선운동음 위한 PES 전개하였다.
한여노협의 이러한 활동의 성과를 토대로 99년 8월 전국여성노동조합이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2000년에는 바정규직 권리찾기 운
동본부를 발족, 전국여성노동조합과 함께 점차 증가하여 여성노동자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비정규직 여성들의 법적 권리를
-30-
실제로 경기 부첨이나 구조조정 과정에서 여성이 일차적인 회생자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조가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적
인 퇴출에 전혀 조직적으로 대웅하지 못하거나, 임시직ㆍ계약직ㆍ파트타이머 등 비정규직 노동자의 약 MS 차지하고 있는 여
성노동력에 대한 조직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노조의 활동방식이나 사업내용 및 방향에서 성에 의한 차별이 존속하고 있는
등 기존 노동조합의 문제 또한 작지 않은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고용안정투쟁의 대안으로 내결었던 노동시간단축 투쟁에서도
여성의 생산, 재생산 노동시간에 대한 평가와 재분배 논의는 삭제되어 있었으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4인 이하 사업장의 여
성 노동자 고용 유지를 위한 시간 단축 방안이나 유통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과 고용유지
를 위한 시간 단축 방안, 전사회적 수준의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임시직, 계약직 | 불안정 고용충의 노동시간 재분배 및 창출
된 시간만큼의 고용창출에 있어서도 '여성'은 배제되고 있었다.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육아ㆍ교육ㆍ보건 등 공공 서비스 축소에
따른 재생산 노동시간의 증대에 대해서도 어떠한 언급도 없었고, 이로써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결국 정규직, 남성, 제조업, 대공
장 노동자들을 FACE 한 대안 마련에 치우치고 만 것이 되었던 것이다. 기존의 노조에 설치되었던 여성부, 여성위원회 등의
활동 또한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평가를 받아 왔다.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성차별을 당했을 경우 이를 호소하는 기관은 노조 외
비공식적인 여성단체였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이러한 척박한 현실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다양한 형태로 조직하고 있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 구성되어 활발한 활
SS 벌이고 있던 여성독자노동조합의 예가 그것이다(일본의 지역여성노동조합들, 인도의 SEWA(Self-imployed Women's
Association), 덴마크 여성노동조합<4&1)) 등) 그리고, Od 1월 11일, 한국에서는 서울여성노동조합과 서울지역여성노동조합)
이 최초 여성 노조로 출범하였다. 또한 같은 해 8월 29일, 전국여성노동조합이 출범을 선포하였다.
이들 세 여성노동조합들은 지금까지 시도해왔던 기업별 노동조합이나 업종별저역노조(00지역 의류노동조합, 제화공노동조합,
인쇄노동조합 등)가 아넌 지역여성노동조합어다. 여성노동조합들어 독자적인 지역여성노동조합으로 설림되는 이유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수적으로 엄청나게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노동운동 내에서 여성노동자들의 문제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이제까지의 노동조합의 방식이 여성들의 삶의 방식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 크다. 다시 말하면
여성들은 한 직장에서 장기 근속하는 경우가 드물고 결혼ㆍ출산ㆍ육아, 가족 간병 둥의 이유로 직장을 자주 옮겨 다니고 있다.
사무직으로도 있다가 생산직으로도 있다가 주부로도 있다가 가내부엄도 하다가, 자녀가 좀 크면 보험도 했다가 하는 식으로 경
제활동의 방식이 바뀌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소수의 전문직을 빼놓고는 단순히 직장을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직업 자체가 자
주 바뀌는 것이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성의 ato} 방식에 맞는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동조합이나 업종별 노
동조합이 아닌 그 지역에서 사는 여성은 모두 가입 대상으로 하는 지역여성노동조합이 여성들의 삶의 방식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 여성노동조합들이 여성노동조합이 지역여성노동조합의 형태로 출발하게된 이유이다12)
또한 의사 결정이나 회의 방식, 단체 교섭 및 단체 행동, 홍보, 문화 활동 등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에서 여성의 생활 조건과 정
A, 현재의 역량을 고려하여 여성의 성장과 자기존중감을 교려하는 방식과 내용으로 운영하여 여성노동자의 조직율을 높이고,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세 노조 모두 출범 이후 활발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전국여성노동조합은 2000년 한 해 동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문제에
AS 맞추고 비정규직 권리찾기 운동본부 활동 및 특수고용직 노동자 법적권리 확보 운동, 모성보호 관련 노동법 투쟁 se
진행했고, 사업장 분회가 결성되기도 하는 등 여러 SBS 전국에서 만들어내었다. 전국여성노동조합연맹 서울지역여성노동조합
의 경우 여성이 908이상을 차지하는 보험설계사의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는 운동을 중점적으로 전개, 보힘설계사들의 노동조
합을 건설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서울여성노동조합 또한 여러 이슈들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운동사회 내 성폭력 ys
8) 자료가 부족하여 간략하게 서술한 점 사과드립니다.
9) “2 나라에 고용 위기라는 거센 폭풍우가 일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여자들은 이제 그만 집으로 들어
가라고, 일자리가 모자라 남자돌도 SAY 판국인데 여자돌이 먼저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냐고 국가와 자본, 그리
고 남성과 언론이 함께 SS 떠마는 것이었다. 결혼한 여자, 나이가 많은 여자,..들이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러자 또 다른 요구가 빗발쳤다. 남자들의 기를 살려줘야 하지 않냐고, 어려운 때일수록 아끼고 아껴야 한다고. 여
자들은 먹을 것을 줄이고 조금이나마 싸게 파는 RE 온종일 찾아다니며 손수 FE 만들고 YASH 간호사가 되
고 교사가 되어 분주히 뛰기 시작했다. 요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제 조금이라도 밥벌이를 해야 하지 않겠
냐는 것. 여자들은 다시 임시직으로 파트타이머로 WSS 받으러 새벽부터 Holchgc.” - 「여성독자노조의 출
범이 한국노동조합운동에 주는 MP), - 서정영주
10) “87년 당시 11.1%이던 여성 노동자 조직율은 97년에 이르러 5.69%까지 떨어졌다. 15.39%였던 87년 남성노동자 조
직율이 97년 14.9%임과 비교해볼 때 노동조합 조직을 HHS 여성 노동자 조직실패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
위한 운동, 실업자 노조 가입을 위한 LSS 전개하는 등 노동조합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기 위한 활발한 활동들을 벌였다.
다." - 권현지, "AAS 급락과 노동조합의 대옹」, "FS, 99년 1월호
11) 서울지역여성노동조합은 같은 해 7월 전국여성노동조합연맹을 설립, 8월 민주노총 산하 연맹으로 가입하였다.
12) 실제로, 전국여성노동조합과 서울지역여성노동조합의 경우, 사업장과 ASS 가리지 않고 여성노동자이면 4
나 가입대상으로 되어있다. 서울여성노동조합은 실업자 여성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여 설립인가를 받지 5
다가 얼마 전 소송에서 승소판결올 받아 실업자도 노동조합 가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성 노동조함ㅇ
는 ASH 사업장이 자주 바뀌는 여성노동자들도 계속 조합원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
--- page 9 ---
3. 나가며
글은 길지만 모두 HA 글이며13) 발제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앞으로 자료로 쓰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쓴 글입니다.
그런 만큼, EES 여성독자노동조합에 대한 이아기를 중심으로 해보았으면 합니다.
- 여성노조의 상급단위를 설정하지 않고 활동하는 방식의 필요성에는 모두 공감하지만 그 독자성 때문에 포괄하지 못 하는 일
들이 종종 발생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조합에 계시는 분들로부터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해
봅시다,
- 지역여성노조로서의 한계에 대해 줬어봅시다. 기존 사업장 노조 운동방식이 포괄하지 못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기 위한 지
역여성노조이지만, 사엄장 노동조합과 비교해보았을 때 힘들거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비정규직여성노동자의 HLA 과제
배진경 (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선전부장) 2002-01-09
비정규직 여성이 계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고용불안과 차별대우, 소득분배의 불평등 동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우리 사회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노동기본권과 평둥권의 확보는 그만큼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한 권
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번 본지 기획에서는 이러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줬어보고 그 과제를 도출해 내보고자 한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규모
비정규직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규모는 얼마나 될까? wold 8월 통계청의 경계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분석한
김유선에 의하면 전체 비정규직은 737만명으로 전체노동자의 55.7%이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 비율이 더 늘어난다. 여성은 379만명
으로 70.980가 비정규이다. 이는 작년에 비해 2만 6천명이 중가한 숫자이다. 이 중 장기임시근로는 504%, 계약근로 189% 시간제 근로
19%, 호출근로 2.2% 특수고용 88%, HAZE 13%, SABE 22%, 가내근로 4.1%로 나타났다.
남성은 학력이 낮을수록 비정규직 비중이 높지만 여성은 학력에 상관없이 비정규직의 비중이 높다. 또한 남성은 24세미만과 60세이상의
고령충에서만 상용직보다 비정규직의 비중이 높으나, 여성은 20대에만 상용고 비율이 높을 뿐 모든 연령충에서 비정규직 비중이 높다.
결국 남성의 경우 비정규직은 저학력, 고연령으로 국한되어 있지만 여성은 학력과 연령에 상관없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이다. 또한
남성은 건설업과 도소매ㆍ음식ㆍ숙박업종에 비정규직이 집중되어 있지만 여성의 경우는 대부분의 업중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배진한 교수가 발표한 '비정규 근로자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단기계약직 +S 유지하거나 늘릴 것이라고 밝힌 사업체는 전체의
66.89였다. BFS] '200[넌 단체협약 체결 지침'에서도 “고용기회 확대 측면에서 노조를 설득하고 비정규직 등 다양한 형대의 근로자
ASS 확대하라"고 명문화한 바 있다. 결국 기업은 앞으로 비정규직을 더 늘리면 늘렀지 줄일 생각은 없는 것이다.
13) 출처
alo Gyo, 한국여성연구회, 동녁
« 「여성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적 과제, - "Hot 제2대학 2000년 2학기 자치강좌 - 여성의 눈으로 세상보기 자료
aa
* 「여성노동조합 건설의 배경과 추진경과, 사업방향』 - 「전국여성노동조합 AAS 위한 토론회 자료집』
+ 「여성독자노조의 출범이 한국 노동조합 운동에 주는 의미」, 「민주노동과 ety OU 2월호
+ 「전국보험모집인노동조합 건설배경, - 600410.0400008.078
22 9}, \40100.01060.066(전국여성노조 홈페이지), \00160119.07.10(서울여성노조 홈페이지), \40100.0ㅁ1@(서울지역여
성노조 홈페이지)의 여러 자료들.
- 33 -
택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표2. 고용형태별 사회보험 및 노동조건 ASS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퇴직금 상여금 시간외수당
정규직 27% 94.8% 80.0% 94.3% 98.1% 756%
비정규직 193% 222% 20.7% 13.6% 140% 9.7%
[경기보조원 업무상 재해실태 및 산재 보험 ASS 위한 토론회] ARE 보면 경기보조원 중 Dot UES 재해 경험 있으며 재해 후
76.8%가 '자비로 치료'했다고 응답했다. 재해 후 치료기간 동안 US 할 수 없어서 경제적 손실이 가중되며 재해로 인해 크게 다친 경
우 사직의 위험도 발생한다. 골프 경기보조 업무가 재해 빈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보호장치도 없다. 사회보험은 위험분산 기능과
소득재분배 기능이 있기 때문에 사회보힘에서 적용이 배제되면 위험에 노출될 경우 불이익을 받게 된다. 특히 중병이나 만성 실업, 중
증장애 등 위험의 강도가 높고 지속기간이 긴 위험에 노출될 경우 받게되는 불이익은 상당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비정규직이 사회보험
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것은 일단 상당한 경제적 불이익을 받을 확률이 높으며 이러한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 대다수는 곧바로 우리 A}
회의 빈곤충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최소한 사회보험에서의 비정규직 차별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든 개선되어야
한다.
특수고용노동자 노동법 완전적용
Dla 한해동안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차례로 노동자성을 부인당했다. 텔레마케터 노조의 노동조합 설립신고에 대해 노동부가 *보험모집
텔레마케터는 노조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라며 WSS 반려하였다. 또한 경남지방노동위원회는 마산\03(: 구성작
가들이 신청한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건이 기각하였으며. 중앙노동위원회는 모험모집인 노조가 제기한 부당해고와 부당노동행위 구제
신청에 대해 근로자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기각하였다. 서울 행정법원은 리베라((:(당시 관악(()경기보조원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근
로자가 아니'라는 BAS 내린데 이어 한화프라자((: 경기보조원들에 대해 '노동조함범상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러
한 결정들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박탈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노동3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이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자신들의 처우를 개
선해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이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이들의 노동3권보장이다.
또한 이들은 실질적으로 직무의 내용과 사용종속의 정도는 정규직과 sts 다를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약형식, 직무내용, 근무형태,
보수지급방법 등의 외향적 형식이 일반노동자와 다르다는 이유로 노동자성을 확실히 증명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두드러진 양상은
여성직업일수록 근로계약방식에서 특수고용형태로 점차 전환,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보조원, 구성작가, 텔레마케터, 학습지 교사
등. 최근 내려진 법원의 판결들은 경제적 종속성과 조직적 종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좁은 의미의 사용종속성을 중심으로 근로자성 여
부를 판단하고, 그 사용종속성의 의미를 고전적 의미의 노무지휘 즉 업무내용 및 업무수행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노무지휘"로
파악하고 있다. 특수고용형태 여성노동자의 보호를 위해서는 근로기준범의 노동자 개념의 확대와 사용자 범위의 확대가 필요하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조직화
비정규직의 확산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결성이다. 하지만 현재 여성노동자의 조직률은 594밖에 되지 않
는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자산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 일어서는 주체적인 dso] 필요하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 결성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여성노동자들이 힘이 약한 것은 조직되어 있지 않고 개별화되어 있기 매문이다. 여성노동자 보호 및 권리신장
을 위해서는 여성노동자들이 .도동조합으로 조직되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대다수가 비정규직
인 여성노동자블 조직하기 위한 여성에게 적합한 조직방식의 개발과, 조직문화, BAS 정착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성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조직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SYS 잘 알고 여성친화적인 정책과 조직방식, 조직문화를 체계화
하여 목적 의식적으로 확대 실시하고 정착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여성노동자의 조직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상정되어 있다.
기간제 노동의 엄격한 게한
비정규직의 가장 큰 문제는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계약직, 임시직 둥 계약기간이 정해져 있는 '기간제' 노동자들은 끊임없는
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근로계약기간을 초과하여 사용하거나 반복 갱신하여 기간제 근로를 상시적으로 사용하는 탈법이 -
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임시직의 경우는 보통 고용주측과 한시적인 Aleks 맺고, 일에 따라 재계약 하는 일련의 과정을 겪게 되는더
통 업무의 성격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사측의 이익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상시적으로 필요한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임시:
마구잡이로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계약의 종료 시기마다 해고될지도 모르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일단 임-
이라하면 근로기준법상 해고제한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근로기준법 제23조는 "근로계약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것과 일정한 사업완료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기간{
년을 초과하지 못한다"라고 하고 있다. 임시근로의 사유와 절차에 관해 사실상 아무런 제한을 가하지 않고 있어 계약기간이 1년만 :
하지 않으면 자유로이 임시근로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대법원의 판례 등에 의해 '1년제한' 규정마저 사문화된 실정ㅇ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상시적으로 필요한 엄무에 비정규직의 AGS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을 개정하여 임시(겨
근로의 사유와 절차 및 기간을 엄격히 제한하고 근로감독 기능을 강화하여 임시근로의 남용을 근절해야한다.
따라서 현행법을 개정하여 근로계약기간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것으로 하고 기간제근로는 객관적, 합리적 이유가 있는 경우에만 :
예외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서면에 의한 근로계약을 작성하지 않거나 근로계약서에 계약기간을 명시하지 않은 경우에는 기간의 :
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근로계약기간을 정한 근로자의 계약기간이 SEM 경우 사용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로 우선:
로 채용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성차별과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 근절
비정규 노동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근절하는 것 또한 시급한 과제이다. 여성의 경우는 성차별이 겹쳐지면서 이중고를 겪고 <
정규직 HIE 예외는 아니지만 비정규직 여성들에게는 결혼, 임신, 출산과 더불어 계약해지 통고가 날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있다. 또한 임금과 승진에서의 차별도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이라며 정당화시키고 있다. 같은 US 하면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
가 달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아래 표를 보자. 서울의 5대학에서 청소업무를 하는 두 여성노동자의 임금을 비교한 것이다.
표1. 정규직과 용역업체 고용 노동자의 임금 비교
연령 학력 ㅣ 경력 | 근속년수 | 엄무내용 | 주당노동시간| 임금총액
정규적노동자(4) | 57세 | 초등졸 | 3년 3년 청소 54시간 1.239082원
용역업체 고용
비정규직 노동자(08)
60세 무학 lod | 1년6개월 청소 52시간 460000원
이들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며 다른 것은 단지 정규직이냐 용역업체에 고용된 비정규직이냐는 것 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들의 임금
이는 무려 7/9.062원이나 된다. 정규직 임금이 비정규직의 27배인 것이다. 통계 FALE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차이는 매우 =
정규직은 지난 3개월간 월평균 임금총액이 2000년 8월 157만원에서 2001년 8월 169만원으로 1만원(7890) 인상된 반면 바정규직은 《
원에서 89만원으로 5만원(56%/)인상되었을 뿐이다. 그 결과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월평균 임금총액은 53.79에서 Ve 격차가 더
대되었다,
하지만, 현행 근로기준법 제5조의 균등처우조항은 차별금지사유로 '고용형태'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근로기준법 제 5:
개정하여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균등대우원칙을 근로기준법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
사회보험 적용
현 직장에서 사회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가입률은 정규직은 81~96%인데 반해, 비정규직은 19~22%밖에 되지 않는다
HAS 퇴직금, 시간외수당, 상여금을 76~94% 적용받지만 비정규직은 10~14%만 적용받고 있다. 결국 비정규직은 각종 사희보험의
- 34 -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비정규직의 조직화, 여성의 조직화라는 두가지 산을 넘어야만 한다. 넘기 어려운 산일수록 도전할 가치는 충'
다
다양한 고용형태를 보이고 있는 비정규고용의 확산은 노동법의 여러 조항들을 무럭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근로기준범만 완전히 준
어도 비정규 노동자들의 무권리 상태는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 전통적인 근로형태 역시 많은 부분 바뀌어 가고 있다. 기업측은
로기준법을 비껴가는 근로형태를 계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를 막기위해서는 범ㆍ제도의 개선이 시금하다. 2001년 한해 동안 1
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층 더 거세어지고 장기화되었다, 여러 여성, 노동단체들도 이에 가세하여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였지민
부와 국회, 정치권의 무관심 속에 비정규노동자를 위한 법개정은 무산되고 말았다. 현재 비정규직의 확산 속도와 양태에 법제도적 :
는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 하루라도 빨리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차별을 제한하는 WS 만들고, 사회보험의 전면적용, 기간제 노동의
격한 제한과 함께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전면 적용하여야한다. 그리고 노동계에서도 이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 나가야할 :
다 비정규직의 조직화와 함께.
참고자료
김유선, 비정규직 실태와 규모 2001
검연명, 왜 사회보험 적용이 필요한가, 2001
왕인순, 여성과 비정규노동, 2001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법원ㆍ노동위원회 판결(정)의 문제점, 비정규공대위, 2001
비정규직을 통해 본 최저임금제 개선방안 토론회, 한여노혐ㆍ전여노조, 2001
경기보조원의 업무상 재해실태 및 산재보험 적용을 위한 토론회, 비정규공대위, 2001
살아있는 현실탐구-2】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화로 인한 문제점
박홍주 (여성연구회 사무국장)
* 이 BS 지난 1998년 “38 세계 여성의 낳“ 기념 사이버토론희에서 나왔던 글로 필자의 허락 하에 약간 고쳐 실었습니다(편집자).
노동시장의 유연화 전략은 비용절감과 탄력적인 노동력 활용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WPS 수행하는 소수의 정규즈
동자와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력을 활용하는 고용정책이 필수적이다. 퇴직금과 각종 복리후생(김장값, 떡값, 각종 대출, 경조비 지급.
통비 지금 등), 각종 수당, 실업보험 및 의료보험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비정규직 노동력의 활용은 고임금을 한탄해 온 기업:
쌍수 들어 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승진 및 승급의 문제, 정년의 문제, 배치 및 이동 등에 관련된 남녀고용평등범
근로기준범을 철저히 지키지 않아도 되니 기업에는 분명 유용한 AEE 보일 것이다. 1990년대부터 우리 나라에 도입되기 시작한 :
시장 유연화 전략은 세계화와 경쟁력 강화 를 기치로, IMF 시대의 유연화 전략은 국가부도사태 방지와 외국인 투자유치를 기치로 -
되고 있다. 긴박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전략, 특히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화는 다음의 문제점들을 가진다.
첫째, 사회복지가 미흡한 현 상태에서 생존권을 위협하게 된다는 점이다. 실업급여의 대상자도 되지 못하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보다 우선 해고되며, 퇴직금이나 여타 생활안정 자금도 부재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길거리로 내쫓긴 노동자들, 특히 한:
분야(조립, 단순 사무직, 경리, 기타 보조업무)에만 비정규직으로 Adel 은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정으로
아간다고 해서 이들의 셈계문제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모든 여성들이 현재 경제위기로 인한 파탄난 가정경제의 책임자이기
문이다. 허리떠를 졸라매야 하는 생활고, 자녀들의 교육비, 남편의 해고에 대한 불안 둥으로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취업했던 여성'
기예. 결국 가장보다는 여성을 해고하는 것,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사회분위기 ㆍ
서 많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노동할 권리는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화는 원활한 노동통제와 노동운동의 약화라는 중요한 WSs 수행하게 될 것이다. 유연화전략을 80년1
터 도입한 미국의 경우를 보면, 날로 심각해지는 고용불안정 현상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Yo] 약화되고 있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She 가장 주변적인 위치에 있는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통해 서서히 여성노동:
--- page 10 ---
노동권을 보장해 왔던 과정을 살펴볼 때, 노동운동의 약화는 곧 여성노동자의 권리와 이해관계를 보장해 줄 Ko)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
기 때문이다. 실제 한 보험회사의 경우 여성의 정규직 채용은 거의 없고, 비정규직 채용(시간제, 촉탁제, 파견제)이 금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현재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포함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HSE 조합원의 ALE 이
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조합에 있어 조합원의 ALE S 노동조합의 약화를 의미하며, SA 대표와 대둥하게 협상할 수 있는 힘
을 상실하게 됨을 의미한다.
셋째, 비정규직화의 금증으로 인한 노동조합의 약화는 각종 여성관련 정책들을 후퇴시킬 뿐 아니라 노동조건의 악화를 가져온다. 정규
직 여성노동자의 생리휴가, 유급 육아휴직, 수유시간 확보, 직장탁아, 유산휴가 SE 축소되거나 없어질 것이며, 이러한 제도의 ays
받지 못하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경우 정규직과 동일한 노동강도를 요구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용과 해고에 있어 용이한 비정
규직 여상노동자의 경우 기엄이 요구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다. 시간제 노동자로 취엄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당 BAS 훨씬 넘는 44
시간 노동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제고용대책회의 심포지움 자료집>에 의하면, IMF 이전인 199년에 주당 44시간 이상 일
하는 시간제 노동자가 전체 시간제 노동자의 3659%를 차지하고 있다. 주 36시간 이상 일하는 시간제 노동자는 65.2%에 달한다. 명목상
시간제 노동자일뿐 전일제 정규직과 비슷한 AS 일하지만, 정규직의 MIE 못미치는 임금과 각종 혜택으로부터의 ANS 경험하
면서 일하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넷째,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화는 여성노동자에게 주변업무로의 배치, 임금차별, 승진 및 sts] 차별을 가져오게 되므로, 전반적으로
여성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남자보다 두 배 이상 노력해 왔을 뿐 아니라 가사노동, 자녀양육의 무거운
이중고를 져 왔던 여성노동자들의 사회적 노동을 하찮은 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
히 비정규직화는 남녀의 직무배치를 분리시키게 되므로, 동일한 노동력인지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여성에게 쉽게
하는 노력해서 능력을 갖추라는 충고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게는 무용지물이다. 동일한 엄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승진이나 승급
도 보장되지 않는 여성에게 독보적인 전문영역을 개발하라,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노력하라는 AAS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욱이 여성에 수행하는 경리나 단순보조 엄무를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의 전문성 확보는 획득될 수 없다. 이뿐
아니라 일하는 보람이나 성취감, 개인의 발전 Se 불가능한 FA 뿐이다.
다섯째, 이런 이유들로 인해 많은 여성들은 일할 의욕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 인건비 절감효과 보다는 생산성 저하가 Festal 나타나
게 된다. 현대해상화재보험회사는 비정규직 여성의 불친절한 고객접대, 무책임한 업무처리 때문에 고객의 불만이 높아지게 되었고, 결국
비정규직으로 채용했던 여직원들음 정규직으로 전환하였다. 이처럼 기업의 이미지가 고객의 중가와 직결되는 서비스산업의 경우 고객지
원 업무나 창구업무, 판매엄무는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YTS 단순한 업무로 생각하여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게 맡길 경우 생산성의
저하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는 것이다. 위의 이유들로 인해 대부분 여성들은 직업의식이 없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 평가는 또
한 전체 여성의 노동을 하찮은 일 로 인식하게 만들게 되는 악순환을 결과할 뿐이다.
1배시대와 여성 노동
이숙진 (여성학과 박사과정) 1988. 12. 31
< USS 이화여성학 SaHolal(htp/ewsewhaacks)2| 여성학포럼방 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
최근 고용조정과 정리해고에 대한 논의들은 노동시장의 HAAS 강화 시키기 위한 시장과 자본의 요구이기도 하다. 노동시장의 유연
화가 여성 노동력에 미치는 영향은 가장 먼저, 가장 심각하게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으며, 그런 점에서 여성들은 노동 시장의 최전선
에서 고용불안을 맞이한 계충이라고 할 수 있다.
aH 여성들이 유연화의 주된 대상인가에 관하여는 가족 내 성별 분업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은 가사노동을 전담하
는 존재임과 동시에 그들의 남는 시간을 활용한다는 의미로 노동시장 참여가 고무되었다. 파트타이머의 여성화는 이러한 전제와 방침으
로 PHU 것이며, 자본이 BRE 하는 저임노동력에 대한 이해관계와 가부장제가 필요로하는 여성 가사전담자의 이해관계가 결탁된 노
동시장의 모습이다. 이는 일시적인 상태가 아닌 장기간의 성별 구조화를 가져오는 형태로 작동한다. 결국 여성들의 각종 비정규직화에
의한 고용불안정은 국내에서 MFS 경험하는 선발대로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미리 경험되었다. 최근과 같은 고용불안의 상황에서 정규
직 보신주의와 맞물려 비정규직 여성들의 계약해지와 무차별한 해고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문제삼지않는 실정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
러한 현상의 근본적 문제점은 여성이 생존을 위하여 남성과 SSA 의미로 노동하는 SAS 간주되지 않는 점이다.
- 37 -
투쟁사례
200244 6월 12일 6:40 논현동 최저임금위원회 앞
최저임금 현실화! 릴레이 시위 돌입
1. 0000년 9월부터 2003년 8월까지 적용되는 최저임금 AIS 앞두고, '빈부격차 해소와 최저임금 BUSS 촉구하는 노동ㆍ여성ㆍ학
생ㆍ종교ㆍ시민사회단체'(이하 촉구단체)는 6월 한달 동안 논현동 최저임금 위원회 앞에서 릴레이 아침 피켓팅 서위를 감행한다.
2. 첫 번째 피켓팅은 6월 10일(수)날 새벽 6.40분부터 전국여성노조, 한국여성노동자희협의회, 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희에서 주관한
다. 이어 촉구단체들이 최저임금 전원회의가 있는 날 아침마다 릴레이 피켓탕을 예정중이다.
3, 지난 5월 29 노사양측은 최저임금위원회 임금수준전문위원회에 새로 적용될 최저임금 ATS 제출한 상태다. 노동자위원은 시급
2.7700원(일급 21600원/월환산 610200원) 현재 FES) 28.6% 인상을 주장한데 반해 중기협은 시급 2190 (일급 17.200원 / 월 485.9002)
으로 24% 인상안을, BES 시급 3188 (일급 17504원 / 월 494.48원)으로 42% 인상안을 내놓았다.
4. 이에 촉구단체들은 사즉에서 주장하는 최저임금 인상안이 터무니없이 낮아 빈부격차해소에 도움이 안된다고 주장하며 릴레이 피켓팅
외에도 '최저임금현실화를 촉구하는 전국캠페인(전국여성노조ㆍ한여노협)', '저임금 노동실태 발표 및 최저임금 개선방안 한국노총 정책
토론희(한국노총)', '최저임금위원회 회의록 공개요청(참여연대)', '10만인 서명운동 및 공익위원면담(비정규공대위)'등 다양한 PES 벌
일 예정이다.
HAF) 전국여성노조ㆍ한여노협ㆍ여성연합ㆍ민우회
MAF) 카톨릭노동사목전국연합회ㆍ민주노총
6/21(금) 비정규공대위ㆍ민주노동당
6/258) 한총련
6/288) 한국노총
시그네틱스 노동자 투쟁 - 최근 상황
1.72 다시 일어서는 시그 : 7월 첫주 투쟁 일정
를 무노조 생존권 말살, 영풍그룹 규탄!
[영풍그룹 규탄과 민주노조 사수ㆍ고용안정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
D 일시: 200275(금) 오후 2시30분
D 장소 : 논현동 영풍본사 옆 알파문구 앞 (784 논현역 번출구)
*
의 Ae 금속노조 서울지부 236-214879 지회 011-256-1978
ee
내 몸까지 ea, 곡기를 끊고 벌인 집단단식농성으로 모자란다면 더 싸우기로 했습니다. 영풍그룹을 규탄하고, 파주공장에서 일하는
날까지, 민주노조 깃발이 파주공장에 휘날리는 날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그 노동자를 BHT 노조를 말삼하려고 발악하는 영풍과 시그네틱스 자본이 스스로 해결의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하게 만들 것입
니다.
구직 단념자가 늘어나고 기혼여성의 재취업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이들은 AAAS 계산되지 않는다. 여성의 MEWS 부정하는 지:
객관적 수치로 표시되는 여러 통계적자료들도 예외가 아니며, 특허나 최근의 로 인한 실업 증가의 수치에서도 나타난다. 429}
용 상황은 실업률 증가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여성의 경제활동 AH] 중가함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위환위기가 오기 전까지의 실업률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고 하는 평가는 여성실업자에 대한 배제를 기초로 이루어진 :
다. 여성들에게 취업은 오래전부터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와 같았다. 구직 단념자가 늘어나고 기혼여성의 재취업은 더욱 어려워:
만 이들은 실업자로 계산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노동시장에서 퇴출한 것으로 간주되어, 가사
나 학업을 이유로 한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과소 평가된 실업률 ARS SG 자세히 들여다 보면 97년 34 분:
경우 남자가 01% 중가하여 2.3%, 여자가 06%증가하여 19%로 나타났다. AMES] 중가폭은 여성이 월등히 높게 나타나는데 비해.
체 실업률은 여자보다 남자가 높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IMF 시대의 한국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어떠한가. 역사적으로 공황이나 경제적 위기는 기흔 여성의 실업을 증가시킴과 동시에, 다른
편으로는 가쪽생계를 위한 소득 활동에 대해 여성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공식적 영역에서는 경력있는 여성까지 ':
으로 돌아갈 WS 고무하면서도 가쪽 단위에서 기본적인 ASS 위해 '벌이있는 여성' 을 요구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여~
에게 이중, 삼중의 WES 가져다 주면서 비공식 부문으로의 여성 ASS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노동진영의 성차별주의가 :
를 들때 노동자 분리는 무차별하게 확산될 것이 분명하고, 그것은 저항과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편으로 사용될 수 《
이미 비정규직화와 고용 Sete] 첨단에 서있던 여성노동자들은 경제적 불황과 위가 상황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부활과 더:
성별분업론에 근거한 이차적노동자임을 강조하는 자본의 SA 직면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공황과 경제적 위기는 보수화를 부채질ㅎ
국가나 자본은 전통적인 성별분업을 위기의 처방으로 사용했던 선례가 있다. 1929년 대공
황시 미국의 경제법 312조가 AEM 여성의 공직을 박탈한 사례 둥이 그러하다. 경제적 위기는 공식적인 노동 시장으로부터 여성:
우선 몰아내고 주부의 역할을 알뜰히 수행함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라고 한다. 어디서든지 가장의 실직은 가족생계를 불안하게 a
여성의 실직은 돌아갈 가쪽이 있는 것으로 무화된다. 기업은 공공연하게 우선 정리해고 1순위로 살생부의 명단을 여성으로 채워가!
빨리 시집이나 가라", “남편이 ES 버니 그만뒤도 되지 않느냐“, “아이 딸린 사무직 기혼 여성이 1차 정리해고 대상" (동아일보 wi
월 0일자)이라는 말들이 스스럼 없이 내밸어지고 있다. 이는 노동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에도 급금한 상후
라는 지적처럼 동료 여성을 걱정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하듯이 노동 age] 성차별주의가 고개를 들때 노동자:
는 무차별하게 화산될 것이 분명하고, 그것은 저항과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IMF 시대가 여성고용에 미치는 최근의 변화는 한편으로 보수적 가부장제 이메올로기의 부활과 더불어 전업주부이자 ''
'있는 여성이라는 이중적 여성역할의 요구에서 찾을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식 부문의 남성화와 비공식 부문의 여성화에 의한
화의 심화 그리고 위기의 SAS 흡수하는 희생양으로서의 YS 요구하는 문화적 담론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 38 -
노동자를 내몰고 무노조 정책으로 생존권을 말살하는 영풍그룹을 규탄하고, 이런 악덕기업이 이땅에 Wed 수 없도록 동지들 함께
대해 주십시오.
<영풍과 시그네틱스에 항의합시다>
※ 영풍그룹 장형진 회장비서실 02)519-3302
주력계열사 고려아연 홈페이지 1060//\\'\010160820000406
* 영풍문고, 영풍의 건전지 MLAs 노동자의 MPS gop 팔아먹는 제품입니다.
oe 한국시그네틱스 양수제 사장실 031-940-7901
2002.72 금속노조 시그네틱스지회
(3661-6619. 홈00207//98400000000.08 투쟁기금 후원:기업은행 김선희 061-040320-02-049)
2. 78시그투쟁-다시 일어나 영풍자본에 맞선 투쟁을 선포하다!
파업351일차-78 시그투쟁-다시 일어나 영풍자본에 맞선 투쟁을 선포하다!
복식투쟁을 마치고 다시 머리떠을 Fool = 다시 일어섰다. 파업투쟁 Sele] 그날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음 것이다
복식투쟁 기간동안 이곳 저곳에서 시그를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싸우고, 울고, 웃으며 시그와 함께 연대투쟁하시는 동지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난 1년을 가열차게 투쟁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르
시 일어났습니다. 다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승리하는날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Sa 것입니다